[선데이 칼럼] 광복절에 생각난 두 어린이
그분은 그 그림 두 장을 나에게 주시면서 이것을 복원해서 가지고 있다가 언젠가 정세가 허락하면 이 그림에 얽힌 사연들을 알아보라고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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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에 맞는 어린이 옷 입은 북한,
성장이 멈춘 채 기형아 됐는지
모양 우스운 어른 옷 입은 남한,
성장통 겪으면서 어른 됐는지
」
복원된 그림 두 장은 아직도 갖고 있는데 하나는 농민혁명의 한 장면(그림) 같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내기를 하다가 잠시 쉬고 있는 젊은 처녀를 그린 것이다. 폐지같이 된 그림 두 장을 어렵게 가져다준 분이 되풀이하면서 아쉬워한 것은 이 그림을 그린 화가가 월북했다는 점이었다. 만일 남한에 남았더라면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이름을 남길 만한 작품 활동을 했을 터인데 북한의 시골에서 외롭게 생을 마감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말씀이었다.
잊고 있었던 그림들을 다시 찾아본 것은 올해로 78주년이 되는 광복절을 지내면서 문득 오래전에 미국의 국립 문서보관소에서 읽었던 낡은 문서 하나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었다. 해방 이후 분단이 된 남북 사이에 많은 인구 이동이 있었지만 그중 특별한 현상은 남한의 많은 문화인 혹은 지식인들이 대거 월북한 것이었다.
한국전쟁 중 인공 치하에서 납북당하신 분들도 계셨다. 아니면 여러 가지 이유로 자의 반 타의 반 월북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전에 완전히 자신의 결정으로 이런 행동을 한 사람도 많았다. 어렸을 때 기억으로, 어른들이 탄식 섞어서 하시는 말씀을 곁에서 들은 일들이 있다. 당시 일부 일반인들 사이에서 흔히 조선의 ‘3대 수재’라고 일컬었던 분들, 이광수·홍명희·백남운 중 두 분이 북한으로 갔다는 이야기였다.
그 당시의 현실을 생각해 보면 이것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사실이다. 한바탕의 미친 파괴가 대규모로 휩쓸고 지나간 뒤, 공산주의와 소련에 대한 장밋빛 전망이 퍼진 것은 한국만의 현상도 아니었다. 온 세계에 특히 지식인 사이에서 그런 일말의 풍조가 있었다. 가끔 나 자신도 그 당시 일정한 연령이었다면 같은 결정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 일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하려는 것은 이런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 세기 한동안 특히 해외의 공식 문서 혹은 개인 문서의 연구에 빠진 적이 있었다. 이것은 책으로 정리된 지식을 대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경험이었다. 미국의 공식 문서보관소에서 조금 특이한 문서 하나를 본 기억이 있다. 언젠가 북한의 지식인 한 사람이 월남했는데 그는 상당한 위상이 있는 분으로 언론 혹은 출판계의 중진이었던 것 같았다. 미군정의 정보 관계자가 그와 나눈 대화의 기록이 어느 한구석에 있었다.
미군 장교가 묻는다. “많은 남한 지식인들이 북한으로 가고 있는데 당신은 어째서 월남한 것인가?” 이분의 대답은 특이했다. “남한이고 북한이고 모두가 아직 어린아이다. 북한의 어린이는 어린이 옷을 입고 있어서 그 모습이나 행동이 모두 자연스럽고 좋아 보인다. 반면에 남한은 어린이가 어른 옷을 입고 있어서 모양도 우습고 행동도 제대로 될 수가 없다. 그렇지만 어린이는 자랄 수밖에 없고 또 자라야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두 아이와 둘 사이의 관계도 달라질 것이다. 어린이 옷을 입은 아이는 성장이 멈추거나 기형적으로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니면 옷이 찢어져야 한다. 그와 반대로 어른 옷을 입은 어린이는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어른스러워지고 행동도 자연스럽게 될 것이다.”
그 당시 불초의 관심은 국제관계였던 까닭에 이 문서를 읽으면서도 그저 재미있는 일화 정도로 생각하고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문서를 복사하거나 노트를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가끔 이 일화에 생각이 멈춘다. 이름도 기억 못 하지만 이분은 그 후 어떻게 되셨을까. 민족이 두 쪽으로 갈라선 지 한 세기가 가까워진다. 북한의 어린이는 단단한 아동복 안에서 정상적 성장이 멈춘 채로 기형아가 되어 있는 것인가? 남한은 우여곡절의 성장통을 겪으면서 어색했던 어른 옷이 이제 제대로 어울리는 어른이 되어 있는가? 아직도 되어 가고 있는 중인가?
라종일 동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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