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기억] 그 걸음, 더 멀리 널리

2023. 9. 2.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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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픽춰_논길의 처녀’, 1920년대. ©정해창
바구니를 든 사진 속 처녀처럼, 그도 사진기를 들고 성큼성큼 걸었을 것이다. 어쩌면 처녀보다 먼저 맞춤한 지점에 도착하기 위해 달음질쳤을지도 모른다. 키 큰 미루나무 혹은 양버드나무 우듬지가 잘리지 않게, 처녀가 달려가는 방향의 끝에서 처녀를 반겨줄 수 있도록 초가집들은 화면 오른쪽에 유순하게 모아두었다. 이윽고 처녀가 논두렁길 가운데 도달함으로써 화면의 중앙에 안착했을 때, ‘철컥’ 사진기의 셔터를 눌렀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어느 날, 필름도 아니고 한 번에 수십 컷을 연속 촬영할 수 있는 디지털은 더더욱 아니고, 유리로 된 건판 한 장을 갈아 끼워야 한 컷을 찍을 수 있는 사진기였다.

그는 사진을 찍던 순간에, 100년 후 미래 세대의 누군가가 이 사진을 보고 가슴 뛰어하는 장면을 상상했을까? 손바닥 크기의 작은 밀착 사진들을 전시와 책 제작이 가능한 상태로 바꾸는 초유의 디지털복원작업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 한 장의 사진에서 비롯되는 것을.

무허 정해창. 예술사진가로서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조선사람. 전시를 위한 예술사진이라는 의미에서 자신의 사진을 ‘살롱픽춰’라 불렀으면서도, 공모전이나 단체전 개념밖에는 없던 시절에 한 번도 공모전에 사진을 출품하지 않았다. 예술은 다른 사람에게 순위가 매겨져 평가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1929년 3월 29일 스스로 서울 광화문빌딩에서 전시를 꾸려 여니, 그것이 곧 우리나라 최초의 사진 개인전이었다.

‘논길의 처녀’로 불리는 위 사진은 무허가 직접 만든 네 권의 수제 책 속에 고이 담겨 후손들에게 전해졌다. 오늘날 사진가들이 사진집 출판이나 전시를 앞두고 만드는 일종의 ‘더미북(dummybook)’을 이미 그 시대에 만든 것이다.

이 달, 그 책 가운데 한 권의 유리건판 밀착본을 사진가 박명래가 복사촬영하고, 프린트마스터 유화가 복원작업을 해서, 디자이너 서민규가 편집한 책이 출판된다. 논길의 처녀에 가슴 뛰어 한 사람들이다. 11월에는 프랑스 파리포토에서 세계 여러 나라의 사진 애호가들에게도 선보여질 예정이다.

사진 속에서 언제고 논길의 처녀가 걷고 있듯이, 우리 사진사에 큰 족적을 남긴 무허의 걸음이 널리 멀리 이어져가기를.

박미경 류가헌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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