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주의역사저널] 세조의 행차와 남은 이야기들

2023. 9. 1. 22:49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정이품송과 문수동자상의 일화
어가 행차 통해 왕권·불심 과시

지난 8월은 이례적인 무더위와 더불어 태풍으로 인한 자연재해로 힘들게 보낸 한 달이었다. 특히 지난 8월10일에는 6호 태풍 카눈의 영향으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던 정이품송 소나무의 가지 2개가 부러지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1993년 2월에는 강풍과 함께 많은 눈이 쌓이면서 가지 1개가 부러졌는데, 30년 만에 다시 큰 상처를 입은 것이었다. 정이품송은 수령이 600년 이상 되는 소나무로, 그 이름이 정해진 데는 세조의 행차와 관련이 깊다.

1464년(세조 10) 2월 세조는 충청도 속리산 일대를 둘러보는 행차에 나섰다. ‘세조실록’ 1464년 2월28일의 기록에는 “왕이 속리사(俗離寺)에 행행(行幸)하고, 또 복천사(福泉寺)에 행행하여, 복천사에 쌀 300석, 노비 30구, 전지 200결을, 속리사에 쌀·콩 아울러 30석을 하사하고 신시(申時: 오후 4시)에 행궁으로 돌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당시 속리산 주변에 빽빽이 들어선 소나무로 인하여 어가 행렬이 법주사 쪽으로 들어가기가 힘들었다. 이때 한 소나무가 가지를 들어 올려 왕의 가마가 쉽게 지나갈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자신의 행차에 상서로운 일이 일어났음을 본 세조는 그 소나무에게 오늘날의 장관 직책에 해당하는 정이품 판서의 품계를 내렸다. ‘정이품송’의 유래는 이렇게 시작되었고, 1962년에는 천연기념물 103호로 지정되었다. 정이품송 소나무가 서 있는 앞마을의 이름을 진허(陣墟)라고 부르는데, 당시 세조를 수행하던 사자위, 장용대 소속 군사들이 진을 치고 머물렀던 것에서 연유한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세조가 오대산 상원사를 찾았던 상황에서 유래한 일화도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상원사를 찾으면 그 입구에 묘하게 생긴 석조 구조물을 발견할 수 있는데, ‘관대석(冠帶石)’ 또는 ‘관대걸이’, ‘갓걸이’라고 한다. 이 구조물은 세조가 물이 좋은 상원사 계곡에서 피부병 치료를 위해 목욕할 때 의관을 걸어놓은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세조가 목욕할 때 어린 동자가 그의 등을 밀어준 일화도 흥미롭다. 너무 시원하게 등을 밀어준 동자를 기특하게 여긴 세조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면서, “그런데 어디에서든 왕의 등을 밀어주었다는 소문을 내지 말라”는 당부를 했다고 한다. 이에 동자는 “그러면 왕께서는 문수동자(文殊童子)가 와서 등을 밀어주었다는 소문을 내지 마십시오”라는 대답을 했다고 한다. 이후 세조는 피부병이 완치됐고, 그때 만난 동자승을 나무에 조각하게 하였는데, 이 조각상은 국보 221호인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木造文殊童子坐像)으로 남아 있다.

1462년(세종 8) 11월5일 ‘세조실록’의 기록에는 “왕이 상원사에 거둥할 때에 관음보살이 나타나는 이상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백관들이 전(箋)을 올려 진하(陳賀)하고, 교서를 내려 모반, 대역, 자손이 조부모와 부모를 살해하거나, 처첩이 남편을 살해한 것, 노비가 주인을 살해한 것 등의 죄 이외에는 모두 용서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문수보살 대신 관음보살로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세조가 상원사에 행차했을 때 문수보살을 직접 만났다는 이야기와 연결된다.

충북 영동의 반야사(般若寺)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전한다. 세조가 속리산 복천사에 들러 9일 동안의 법회를 끝낸 뒤, 승려 신미(信眉) 등의 요청으로 대웅전에 참배하였다. 이때 문수동자가 세조에게 따라오라 하면서 절 뒤쪽 계곡인 망경대(望景臺) 영천(靈泉)으로 인도하여 목욕할 것을 권하였다고 한다. 세조는 기분 좋게 절에 돌아와서 직접 쓴 어필을 하사하였고, 이 어필은 지금까지 보관되어 있다. 이후에 절의 이름을 반야사라고 한 것도 이 절 주위에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신앙 때문이며, 문수의 반야(般若: 지혜)를 상징하여 절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한다. 세조가 상원사나 법주사와 같은 절을 자주 찾은 것에는 불교에 대한 깊은 관심과 함께 행차를 통하여 왕권을 과시하고 민심을 안정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다. 속리산의 정이품송과 상원사의 문수동자상은 세조 행차의 생생한 현장 모습을 증언해 주고 있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