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보이지 않는 벽을 넘어서
그녀의 삶·문학 이해하기 위해
호주 강제이주 아픈 역사 조우
서로를 이해하는 소중한 기회
나는 호주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호주의 역사나 문학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고, 호주를 그저 먼 이국의 아름다운 휴양지 정도로만 여겨왔다. 그런 나에게 ‘인비저블 월 프로젝트(Invisible Wall Project)’는 호주의 역사와 문학을 이해하는 소중한 기회였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호주 시인들과 한국 시인들은 일대일로 만나 지속적인 대화를 나누고 이를 바탕으로 쓴 시를 출간한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열 명의 시인들이 둘씩 팀을 이루어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와 좀더 구체적인 대화를 나누기 위해 나는 호주 원주민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필킹톤 가리마라의 소설 ‘토끼 울타리를 따라서’를 알게 되었고, 이 소설을 각색한 필립 노이스 감독의 ‘토끼 울타리’라는 영화도 구해 보았다. 원주민의 정체성을 지우고 백인에게 동화하는 정책으로 인해 가족에게서 강제 분리된 백인 혼혈아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필킹톤 가리마라는 ‘도둑 맞은 세대’라 불리는 원주민 소녀들의 탈출과 9주 동안의 귀향을 기록했다. 몰리, 그레이시, 데이지, 이 세 소녀는 무려 1600㎞를 걸어서 지가롱의 집으로 돌아온다. 백인이 사냥용으로 들여온 외래종 토끼가 지나치게 번식하자 이를 막기 위해 울타리를 설치했는데, 그 토끼 울타리가 원주민 소녀들을 안내하는 나침반 역할을 했다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하지만 그들의 귀향은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몰리는 결혼한 후에 두 딸과 함께 원주민 거주시설로 이송되었고, 딸 한 명을 데리고 다시 탈출했다. 원주민 시설에 홀로 남겨진 딸이 바로 필킹톤 가리마라였다.
우리가 줌을 통해 만났던 5월 26일, 그날은 마침 ‘사과의 날’이었다. 호주 정부가 100년 동안 백인혼혈 아이들을 원주민 가족으로부터 강제 분리했던 일을 사과하는 날이다. 사만다는 그 파란만장한 역사에 대해, 그리고 원주민의 후예들이 오늘날엔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해 들려주었다. 사만다는 ‘도둑 맞은 세대’보다는 나중에 태어난 세대이지만, 그녀 역시 강제 이주와 실향의 고통을 겪었다. 이렇게 사만다의 삶과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 나는 호주의 고통스러운 역사 속으로 조금씩 걸어 들어갔다. 최근엔 호주의 페미니스트 생태학자 발 플럼우드가 쓴 ‘악어의 눈’이 한국어로 번역 출간되었는데,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읽고 시를 쓰기도 했다. 사만다와의 인연이 호주에 대한 관심으로 계속 이어졌다.
나는 그녀의 시에 나오는 산호초의 안부를 물었고, 기후위기와 산호초의 백화현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만다는 내 영역된 시 ‘세계 끝의 버섯’에 나오는 버섯에 관해 물으며 호주에는 어떤 버섯들이 자라는지 설명해주었다. 애나 칭이 쓴 책 제목이기도 한 ‘세계 끝의 버섯’은 내가 베란다에서 키우는 식물 화분에 갑자기 돋아난 버섯을 보고 쓴 시였다. 늦은 밤에 사방으로 흩어지는 포자들을 보며 유성생식을 하지 않고도 오래도록 생명을 이어온 존재들을 생각했다. 인류학자 애나 칭이 동양의 송이버섯이 어떻게 채취되고 유통되는지를 연구하면서 세계 자본의 흐름을 읽어낸 것처럼, 우리 시인들은 은밀하게 자라난 버섯을 통해 땅속의 세계를 상상한다. 그 축축하고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함께 걷듯이 우리의 마음은 더 멀고 먼 숲으로 향했다. 이처럼 사만다와 이야기를 나눈 시간은 보이지 않는 벽을 넘어 서로의 근원을 찾아가는 여행이기도 했다.
나희덕 시인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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