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죽을 무렵 소련과 연합한 미·영·프도 ‘공산 전체주의’ 세력인가
육군사관학교 홍범도(1868~1943) 동상 이전 결정 과정에서 불거진 가장 큰 논쟁거리는 ‘독립운동사상 최대의 비극’이라 불리는 ‘자유시 참변’이다. ‘홍범도 학살 개입’ 같은 단정적 제목을 단 보도는 동상 설치 때부터 등장했다.
참변 때 홍범도가 다른 단체 독립군을 죽이는 데 가담했다는 기록은 없다. ‘홍범도가 자유시 참변 때 소련 정부 편을 들었다’는 말도 나오는데, 자유시 참변은 1921년 6월 벌어졌다.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은 이듬해인 1922년 들어섰다.
홍범도와 자유시 참변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논문은 윤상원(전북대 사학과 교수)의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사변’(2017)이다. 논문 주된 내용은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홍범도가 러시아 적군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 참변 때 홍범도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좇아간다.
한인 무장부대 대립 속 홍범도, 코민테른 고려혁명군정의회 힘 실어줘
1921년 3월 초까지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 무장부대 군인 총수는 대략 2000명 정도다. 6월에는 약 3000명에 이르는 한인 독립군들이 자유시에 모인다. 한인 무장부대는 양분된다. 러시아 공산당 극동공화국의 지원을 받는 상해파 고려공산당 계열의 대한의용군(사할린의용군)과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의 지원을 받는 이르쿠츠크파 계열의 고려혁명군이 지휘권을 두고 대립했다.
코민테른 극동비서부는 두 파의 대립을 조정하려고 고려혁명군정의회를 설치하고 총사령관에 칼란다리쉬빌리를 임명한다. 홍범도는 6월 2일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마자노프를 떠나 자유시로 이동한다. 윤상원은 이 이동을 두고 “간도로부터 이동해온 독립군부대 대부분은 이제 통합의 주체를 고려혁명군정의회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말한다. 인정 이유는 “‘무장부대 통합’이라는 명분과 ‘소련 및 코민테른의 권위’에 대한 인정, 그리고 ‘무기 및 식량의 원활한 공급’이라는 현실적 조건에 대한 고려 때문”이라고 봤다. “군정의회가 이르쿠츠크로부터 대동하고 온 군대, 즉 합동민족연대의 한인부대 600여 명과 카자크 기병 600여 명으로 구성된 군정의회 군대의 강력한 무장력에 대한 인식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고 말한다.
6월 19일 한인 무장부대의 군 간부 전체회의가 소집된다. 고려혁명군정의회 중심으로 무장부대를 통합하겠다는 결정안이 통과된다. “홍범도를 중심으로 한 간도의 독립군부대들이 고려혁명군의 손을 들어주었던 사실이 대한의용군에서 고려혁명군으로 통합의 주도권이 넘어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은 명확하다”고 윤상원은 봤다.
반목과 대립 끝 홍범도 ‘같이 싸우지 않았다’고 공격받아, 홍범도는 사살
장세윤(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은 2021년 논문 ‘독립전쟁의 영웅 홍범도의 귀환, 그 시사점과 과제’에서처럼 “홍범도는 자유시사변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선택과 결정을 내림으로써 휘하의 독립군 세력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다른 독립군에 대한 학살을 막지는 못했다. 독립군 한쪽은 홍범도를 ‘배신자’로 여겼다.
사할린 의용대 출신 김창수와 김오남이 1923년 8월 하바롭스크에서 홍범도를 불시에 공격할 때 이유는 참변 당시 칼란다리쉬빌리 군대에 맞서 싸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홍범도는 레닌에게서 받은 권총으로 이들을 사살하고 감옥에 갇혔다가 레닌과 칼리닌 등의 증명서를 얻어 석방된다.
주미희(한국외국어대 강사)는 참변 1년 뒤 상황을 분석한 ‘자유시참변 1주년 논쟁에 대한 고찰’(2021)에서 “(참변) 진상과 책임규명에 논쟁뿐만 아니라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들에 대한 직접적인 테러와 암살 시도가 연이어 발생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자유시참변으로 인한 독립운동가들 사이의 반목과 대립이 얼마나 크게 작동했는지를 알게 해준다”고 했다.
대한의용군 지도자 50명 재판 참여, 실형은 3명
1921년 고려혁명군정의회 조정이 실패하자 칼란다리쉬빌리가 대한의용군에게 무장 해제를 명령했다. 대한의용군이 받아들이지 않자, 고려혁명군정의회가 무장 해제에 들어간다. 대한의용군이 주둔하던 수라제프카 공격 과정에서 독립군들이 죽었다. 피해와 가해 측 통계가 다르다. ‘사망 36명, 포로 864명, 실종 59명’, ‘사망 272명, 익사 31명, 실종 250명’ 자료가 나와 있다.
무장해제와 공격 과정에서 홍범도가 직접 개입하거나 현장에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국사편찬위의 <한국독립운동사> 34권은 홍범도가 “장교들과 솔밭에 모여 땅을 치며 통곡했다”다고 전한다.
홍범도는 대한의용군 측 지도자 50명에 대한 군사재판에는 참가했다. 고려혁명군 기관지인 ‘붉은 군사’엔 재판위원장은 채동순, 위원은 홍범도와 박승만으로 나온다. 윤상원은 “아마도 한인 빨치산들 사이에서 가지고 있던 명망과 권위가 선임된 이유였을 것이다. 고려혁명군 측은 항일의병장으로서 명성이 높은 홍범도를 위원으로 선임해 재판이 불편부당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을 것”이라고 했다. 홍범도는 병사들이 피해를 보지 않고 공정한 판결이 나올 수 있도록 하려고 재판에 참가했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실형(징역형 2년)을 받은 독립군은 3명이다.
윤상원은 이 재판 위원을 맡을 일을 두고 “홍범도 개인에게는 무척 불행한 일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고 했다. “재판은 고려혁명군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던 사람들에 대한 판결을 내려야만 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공산당 지원과 응원이냐, 공산주의 한 부분이냐
자유시 참변의 원인은 무엇일까. 주미희는 “한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소비에트 러시아의 지원과 응원을 얻으려 했던 상해파와 러시아 내의 공산주의 한 부분이 되려 했던 러시아화 된 한인들인 이르쿠츠크파 간에는 상당한 간격이 존재했다. 동아시아 민족해방운동이 코민테른 하에서 작동되면서 볼셰비즘의 보편화라는 코민테른의 정책과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코민테른 담당자들의 이견이 고스란히 투영되는 문제점을 가져왔다. 이에 따라 자유시참변은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간의 정치노선의 충돌 결과이자, 상해파와 소비에트 러시아 및 코민테른 정책과의 대립의 산물로 볼 필요성이 제기된다”고 했다.
신주백은 ‘[자유시 참변 후 100년]독립전쟁과 1921년 6월의 자유시 참변’(2021)에서 민족 운동 세력 사이 다툼에다 통제권을 쥔 러시아 공산당 사람들의 일관되지 않은 무원칙한 편 가르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봤다. “더구나 현지의 러시아 공산당은 외국인부대인 독립군과 혁명 성공을 지원하는 빨치산부대에 대한 국제주의원칙을 저버리고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참변이 확대되는 근본 원인을 제공하였다”라고 했다.
공산당 가입 등은 불가피하거나 자연스럽게 선택한 생존과 투쟁의 한 방편?과정
홍범도는 1922년 1월 21~2월 2일까지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민족대회에 고려혁명군 대표자로 참석해 레닌과 회견했다. 권총과 친필 서명이 든 기념품을 선물로 받았다. 1922년 말 고려혁명군이 소련 적군 제76연대로 개편되면서 고려혁명군에서 제대했다. 나이 54세 때다.
1927년 소련공산당에 입당했다. 이후 협동조합에서 일하다가 1937년 소련 정부의 연해주 한인 강제 이주정책으로 카자흐스탄공화국 크질오르다로 이주했다. 협동조합 일을 하며 살았다.
장세윤은 “오늘날 일부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홍범도의 소련공산당 입당과 일부 사회주의 사상 수용 및 사회주의 조직 관련 행적, 1920년대 중・후반~40년대 전반기 사회주의국가에서의 말년 행적 등을 현재의 관점에서 무리하게 재단해서는 안된다고 본다”며 “당시 독립운동, 민족해방운동 과정에서 나라가 없는 약소민족, 이산 소수민족의 지도자로서 민족해방운동과 생존을 위한, 불가피하거나 자연스럽게 선택한 생존과 투쟁의 한 방편・과정이었다고 평가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장세윤은 홍범도가 독립운동 과정에서 아내와 두 아들을 잃고, 자신의 삶을 오롯이 독립운동, 민족해방운동, 중앙아시아 한인 사회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바친 점도 거론했다. “20여 년간 줄기차게 죽음을 각오하고 독립운동, 민족해방운동에 혼신의 정열과 노력을 기울인 인물은 정말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장세윤은 1991년 발표한 ‘홍범도 일지를 통해 본 홍범도의 생애와 항일무장투쟁’에서도 “우리에게 더 중요한 문제는 그의 이념이 무엇인가를 구태여 무리하게 재단하기보다는 그의 철저한 항쟁과 투철한 애국심이 어디서 연유하고 결국 무엇을 위한 것이었구나 하는 것을 규명하는 일이다. 왜나햐면 홍범도는 이론이나 사상을 앞세우고 행동한 사람이 아니라 철두철미하게 실천적 투쟁으로써 구국항쟁에 앞장선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일본과 휴전할 때는 ‘이상적 소비에트 시민’, 전쟁 이후에는 ‘조선인 항일 투사’
홍범도에 대한 인식은 시대에 따라 변화됐다. 오세호(국민대)는 ‘중앙아시아 고려인사회의 정체성과 홍범도 인식’(2016)에서 홍범도에 대한 인식 변화를 분석한다.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 뒤 고려인사회는 홍범도로 “독립운동가 이상의 상징적 인물로 부각”한다. 당시 고려인사회는 1930년대 후반 스탈린의 숙청 아래 대부분의 고려인 지도자들을 잃은 상태였다. 소련당국은 1934~1938년 고려인 공산주의 지도자들을 집중 숙청했다. 고려인은 일본의 첩자라는 누명을 쓰고 ‘적성민족’으로 몰렸다.
오세호는 “홍범도는 일찍이 레닌으로부터 항일빨치산의 혁명가로 인정받았을 뿐 아니라, 독소전쟁 때는 참전 의지를 강하게 표출”한 홍범도를 ‘이상적 소비에트 시민’으로 부각했다. 홍범도는 1941년 ‘레닌의긔치’에 “젊은이들에게 무기를 잡고 독소전쟁에 참전할 것을 촉구”했다. 이때 홍범도의 항일 투쟁은 내용은 잘 나오지 않았다. ‘레닌의 긔치(기치)’는 ‘조선 빨찌산 운동의 거두’, ‘레닌-쓰딸린당의 충직한 당원’ 같은 표현을 쓰며 “홍범도를 항일 독립운동가 보다는 계급투쟁에 나선 빨치산 출신이자 당원임을 강조”했다.
오세호는 소련이 1941년 일제와 중립조약을 체결한 상황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고 파악했다. 소련은 1945년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 한 뒤 고려인사회의 인식은 변한다. ‘조선 독립을 위하여 수십 년간 일본 군벌들과 투쟁’한 인물로 표현하며 항일투쟁 경력을 강조했다. ‘조선 민중의 사랑이며 자랑’이라며 조선인임을 강조했다. 고려인사회에서 ‘조선인 항일투사 홍범도의 민족정신’을 강조하는 일은 1950년대 이후로도 이어졌다.
‘공산당 가입=소련, 북한 남침 사주=홍범도는 대한민국의 적’
보수 우익의 최근 ‘홍범도 흔들기’는 윤석열 정권의 ‘공산 전체주의’ 타도 기조와도 이어진다. ‘홍범도 공산당 가입=소련 공산당은 북한 남침 사주=홍범도는 대한민국의 적’이라는 단순한 도식이다. 홍범도는 해방 이전 사망했다. 죽기 전 주요 공식 활동 하나가 독일과 일본 등 파시즘에 맞서 싸우자는 것이다. 1941년 6월 독소전쟁이 발발 때 홍범도는 ‘레닌 기치’에 ‘이전 빠르찌산 - 홍범도’ 명의로 ‘원쑤를 갚다’라는 글을 기고했다. “나는 지금 늙엇다. 그러나 나의 마음이 지금 파시쓰트들과 전쟁을 한다. 젊으니들! 모도 무긔를 잡고 조국을 위하여 용감하게 나서라!”고 했다. 당국을 찾아가 참전을 호소했지만, 고령이라 거부됐다는 일화도 전한다.
2년 뒤 1943년 10월 25일, 75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1943년 소련은 미국, 영국과 프랑스와 함께 연합국 일원으로 참전 중이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이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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