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8개로 엮은 ‘지구사적 페미니즘’[책과 삶]
페미니즘들
루시 딜랩 지음·송섬별 옮김
오월의봄 | 500쪽 | 2만8000원
페미니즘의 역사는 주로 ‘물결’의 서사로 이야기된다. 19세기~20세기 중반 여성참정권 운동이 벌어진 시기를 제1물결, 1960~1990년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슬로건과 함께 등장한 여성해방운동을 제2물결이라 본다. 여성 내부의 불평등 문제를 더욱 활발히 제기하기 시작한 21세기의 움직임을 제3물결이라 칭한다.
영국의 역사학자 루시 딜랩은 이 같은 ‘물결 서사’에 큰 허점이 있다고 봤다. 페미니즘의 역사를 유럽과 미국의 교육받은 백인 여성들이 이끌었다는 잘못된 믿음을 강화한다는 것이었다. 실제 뉴질랜드의 원주민과 정착민 여성들은 1893년 투표권을 얻었는데, 이는 유럽이나 미국 여성들보다 한참 앞선 것이었다. 시에라리온 토착민 여성 가구주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것은 놀랍게도 1792년이다. 반대로 서구에선 이미 오래전 ‘해결된 이슈’로 여겨진 참정권 문제가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중동 국가에선 2000년대 초반까지 ‘현재진행형’ 의제였다.
딜랩은 페미니즘이 하나의 그림이 아닌 ‘모자이크’라고 봤다. 서구라는 단일한 공간에서 태어나고 발전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지역의 관점과 경험의 조각이 이어붙여졌다는 의미다. 딜랩이 페미니즘을 ‘지구사적’으로 분석한 책의 제목이 <페미니즘>이 아니라 <페미니즘들>(Feminisms)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저자는 18~21세기 한국, 러시아, 이집트 등 서구 밖의 페미니즘을 ‘꿈’과 ‘생각’, ‘공간’, ‘사물’, ‘모습’, ‘감정’, ‘행동’, ‘노래’라는 8개 키워드로 꿰어낸다. 지구 전체로 시야를 확장하는 경험은 페미니즘을 한층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한다고 그는 말한다. 지난 250년간의 노력과 이를 통해 이룬 진전은 거대한 백래시를 마주하고 있는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에게 특히 위로가 된다.
최민지 기자 m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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