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몸을 삼킬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집어드는 여자들의 이야기[김소연의 논픽션 권하기]

기자 2023. 9. 1.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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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하미나 지음
동아시아 | 332쪽 | 1만6000원

얼마 전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새삼스레 흠칫 놀랐다. 모여 있던 사람들의 절반 이상이 우울증과 관련된 약을 복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병원을 추천하게 된 장면과 조용히 가방을 열어 약을 꺼내는 사람에게 슬며시 마실 물을 건네는 손길이 있었던 장면과 무언가 과잉되고 결핍된 스스로의 면면에 대해 한숨 섞인 고민을 꺼내놓는 장면과 밥벌이 현장에서 참고 견디고 삭여왔던 감정들에 대해 토로하는 장면들이 함께 떠올랐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누군가 책 한 권을 권했다. 누군가는 이미 읽었다고 했고 누군가는 책 제목을 받아적었다. 나도 덩달아 그 책을 권했다. 자주 꺼내드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하미나의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여자들에 대한 책이다. 여자들의 우울증에 대한 책이다. 우울증을 앓고 있는 저자 하미나가 우울증을 앓고 있는 인터뷰이들을 만난 내용들이 빼곡하게 담겨 있다. 질병에 대한 체험담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이에 대한 접근을 역사와 과학과 사회학의 교차점에서 다루고 있다.

이렇게도 설명이 가능하다. 이 책은 여자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여자들이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를 여자들 개인의 것으로 해석하지 않고 이 세계에 기입하고 맥락화하는 작업이 담겨 있는 책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여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책이기도 하다. 말하기와 들어주기의 상호작용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 때에 가장 이상적일 수 있는지, 그 예시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안내서이기도 하다. 우울증이 키워드이지만, 우울증이라는 프레임으로 한 사람을 바라보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커다란 힘이 있는 책이다. 이야기를 꺼내고 그것을 받아내는 과정이 어떤 방식에 의해 해방감과 연결될 수 있는지가 촘촘하게 배열되어 있다. 설명이 불가능한 고통은 이렇게 하나의 자료로 제시되어 설명이 가능해질 수 있는 단서들로 차곡차곡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이 책은 미리 헤아리고 있다.

이 책에 인용된 마야 뒤센베리의 <의사는 왜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가>(2019, 한문화)의 한 구절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여성과 사회적 빈곤층이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증상을 더 많이 보인다면 이는 아마도 의학이 이들 계층의 증상을 탐색하는 데 관심이 없기 때문일 것.” 여성이 신체화해온 온갖 사회적 고통들에 대하여 개인이 극복하고 회복해야 할 질병으로만 바라보면 안 되는 이유, 오히려 그 안에 차곡차곡 쌓여온 서사들을 제대로 읽고 수용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는 이유가 저 한 문장 안에 오롯하게 담겨 있다.

마음이 몸을 삼켜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 들 때 나는 책을 읽는다. 같은 증상을 겪고 있는 동지를 가장 손쉽게 만나 가장 정확하고 빠르게 소통하는 방법 중에 독서만 한 것이 없다. 누군가가 이 모호한 것들을 이미 조심스레 건사해 문장으로 명쾌하게 정리해놓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나는 조금 나아지기 시작한다. 나의 갑작스럽고 버거운 함몰로부터 벗어나는 출구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독서를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절반은 나아진다.

내가 손에 든 책이 시대가 다르다 할지라도, 작가의 허구가 다분히 개입한 소설이라 할지라도, 모호했던 것들이 보편과 질서를 얻어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은 동시대의 이야기이고, 허구에 기대지 않는 이야기이고, 고통받고 있는 여성의 아픔에 따뜻한 위로의 손길을 건넨다기보다 어깨를 겯고 같은 길에 서 있는 이야기라서, 전달되는 힘은 여느 책과 사뭇 다른 단단함이 있다.

내가 아프지 않다 하더라도 주변을 둘러보면 나와 접촉하고 있는 누군가가 아프고 있다. 그 아픔에 대한 몰이해에 나는 놓여 있을 것이다. 병명을 지닌 질병이 없다 해도 여러 증상들을 겪고 있다. 자신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증상들을 타인으로부터 이해받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지를 이미 알고, 미리 자신의 증상에 대한 공감을 포기하고 주눅든 채 살아가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가. 하미나의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은 이해받고 싶음과 이해되지 않음 사이에다 다리를 놓는 작업을 하고 있다.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사이의 경계를 없애는 작업을 하고 있다. 누군가의 고통이 곧 그의 자긍심이 될 수 있다는 명제를 힘껏 실천해낸 작업이기도 하다.

이 책의 제8장 ‘돌봄’ 속에는 이런 문장이 담겨 있다. 하미나가 이 책을 세상에 내어놓은 가장 중요한 관점 하나를 옮겨놓고 싶다.

“세상이 자신을 미친년으로 보면 미친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그런 면에서 나는 이들을 단지 우울증 환자로만 보지 않는다. 이들은 미쳐 있고 괴상하지만, 동시에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들에 대한 말과 글이 아니라 이들에 의한 말과 글이다.”

김소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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