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KAL기 격추 40주기
요즘 유럽이나 북미행 비행기를 타면 종전보다 2~3시간이 더 걸린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이후 전 세계 항공사들이 러시아 영공을 우회하기 때문이다. 최단 노선을 택해 유류비와 운항비를 아끼는 데 익숙한 항공사들엔 난감하고 낯선 상황이다. 전쟁의 불똥이 하늘로 튄 것이다. 반면 중국 항공사들은 러시아 영공을 통과하는 종전 노선을 유지하고 있다. 냉전이 한창이던 20세기로 돌아간 느낌이다.
▶1983년 8월 31일 대한항공 KAL 007기가 뉴욕 JFK공항을 이륙했다. 연료 보급차 앵커리지를 거쳐 베링해, 쿠릴열도 남쪽, 일본 상공을 지나 다음 날 오전 김포공항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소련 영공을 우회하는 항로였다. 하지만 007기는 무슨 이유에서 그랬는지 소련 캄차카반도와 사할린 인근 상공을 잇따라 통과했다. 첫 번째 영공 침범을 놓친 소련이 부랴부랴 전투기를 발진시켜 미사일을 쐈다. 승객과 승무원 269명이 전원 사망했다.
▶여러 음모론이 제기됐다. 미 CIA가 소련의 방공망을 시험하고자 벌인 일이란 설도 그중 하나다. 소련은 007기를 미국의 RC135 정찰기로 오인했다고 주장했다. 사할린과 캄차카반도 주변이 미국 정찰기들의 주요 작전 지역이었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007기는 등화관제에 철저한 군용기와 달리 항법등(燈)과 충돌 방지등을 켜고 있었다. 칠흑 같은 시간대였다 해도 민항기를 구별 못 했다는 변명은 믿기질 않는다.
▶그보다 5년 전 비슷한 사고가 있었다. 1978년 4월 20일 파리 오를리 공항을 이륙해 김포공항으로 가던 KAL 902기가 경유지인 앵커리지를 향하다 돌연 기수를 돌려 소련 영공을 침범했다. 긴급 발진한 소련 전투기가 미사일을 발사했다. 다행히 인근 호수에 비상 착륙했지만 이 과정에서 승객 2명이 숨졌다. 그때도 소련은 902기가 미 RC135인 줄 알았다고 주장했다.
▶오인 격추는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미 해군 순양함은 1988년 7월 호르무즈 해협 상공을 지나던 이란 민항기를 대공 미사일로 격추했다. 290명이 숨졌다. 이란 공군 F14 전투기로 오인했다고 한다. 2020년 1월엔 우크라이나 여객기가 테헤란 공항 이륙 직후 이란 혁명수비대의 대공 미사일을 맞고 추락했다. 176명이 사망했다. 미국의 순항미사일로 오인했다고 한다. 하지만 전투기가 근접 거리에서 민항기를 두 번이나 격추한 사례는 소련이 유일하다. 지금 푸틴은 그런 소련의 영광을 되찾겠다며 침략 전쟁 중이다. 40년 전 비극이 다시 일어나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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