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한·일 시민 함께…“간토대지진 학살 100년, 정부 나서라”

김소연 2023. 9. 1.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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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학살 100주년 추도식
1일 오전 11시 도쿄 스미다구 요코아미초 공원에서 ‘일조협회’ 등 일본 시민단체로 구성된 ‘간토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전 실행위원회’가 주최한 100주기 추도식이 열렸다. 추도식에 참석한 한일 시민들이 추모비 앞에서 추모를 하고 있다. 도쿄/김소연 특파원

“일본 정부에 요청합니다. 지금이라도 희생자와 유족들의 아픔이 치유될 수 있도록 나서주십시오.”

1일 오전 11시 도쿄 스미다구 요코아미초 공원. ‘일조협회’ 등 일본 시민단체로 구성된 ‘간토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전 실행위원회’가 주최한 100주기 추도식이 열렸다. 경남 거창군에서 온 조선인 희생자의 유족인 조광환(63)씨가 추도식에 참석해 일본 정부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조씨의 큰할아버지는 지진 직후 일본의 군·경과 자경단에 의해 대대적으로 이뤄진 조선인 학살에 휘말려 숨진 조권승(1893~1923)이다. “큰할아버지의 죽음을 알려준 것은 일본 정부도 한국 정부도 아닙니다. 머리에 칼을 맞았지만, 가까스로 살아 돌아온 큰할아버지의 후배입니다. 유족들의 슬픔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요.”

일본 정부를 향해 분노를 토해내던 조씨는 50년 가까이 조선인 학살 희생자를 위해 추도식을 진행하고 있는 일본 시민들을 향해선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는 “이렇게 추모비를 마련해주고 해마다 추도식을 유지해준 것에 정말 감사하다”고 말한 뒤 큰절을 올렸다. 지난 비극을 잊지 않으려는 일본 시민들은 1973년 모금을 통해 이곳 요코아미초 공원에 조선인 학살 추모비를 만들고, 이듬해부터 49년째 추도식을 이어오고 있다.

미야가와 야스히코 실행위원장은 추도식에서 “일본 정부와 도쿄도는 10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조선인 학살의 진상을 조사하거나 살해된 유족에 대한 사과와 보상 등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이어 “망각은 또다시 악몽을 낳을 위험성이 있다. 참상을 잊지 않고 알려 나가는 것이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책무”라고 강조했다.

도쿄 스미다구 요코아미초 공원에 있는 간토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 도쿄/김소연 특파원

간토대지진 100주기를 맞아 많은 일본 시민들이 추도식에 참여했다. 추도식에 처음 왔다는 오쿠라(21)는 “대학에서 공부를 하기 전까지 조선인 학살에 대해 잘 몰랐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며 “(일본) 정부가 이런 사실을 숨긴 것에 화가 난다. 조선인 학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추도식엔 한국에서 온 ‘간토학살 100주기 추도사업 추진위원회’(추진위) 관계자들도 대거 참여했다. 이나영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은 “100년이 지났지만, 희생자들은 왜 죽어야 했는지 원인도 알 수 없는 상태다. 이 문제는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라며 “한·일 시민들이 지금처럼 연대해서 역사의 정의를 바로 세우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엔 일본 우익단체인 ‘간토대지진 진실을 전하는 모임, 소요카제’가 조선인 학살 추모비 앞에서 집회를 예정해둬 긴장이 고조됐다. 이 단체는 2017년부터 추도식이 열리는요코아미초 공원에서 약 30m 떨어진 곳에서 “조선인 6천여명 학살은 거짓”이라며 방해 집회를 해왔다. 이번엔 장소를 아예 추모비 앞으로 옮긴 것이다. 하지만, 일본 시민 수백여명이 추모비 앞을 지켜서 이들의 접근은 이뤄지지 못했다.

경남 거창군에서 온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 희생자의 유족인 조광환(63)씨가 1일 도쿄 스미다구 요코아미초 공원에서 열린 ‘일조협회’ 등 일본 시민단체로 구성된 ‘간토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전 실행위원회’가 주최한 100주기 추도식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도쿄/김소연 특파원

간토대지진은 1923년 9월1일 오전 11시58분 발생한 규모 7.9의 대규모 재해다. 그로 인해 10만5천여명이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됐다. 참사 직후 희생양을 찾으려는 험악한 사회 분위기와 맞물려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유언비어가 확산됐다. 그 여파로 일본 군·경과 자경단이 조선인, 중국인, 일본인 사회주의자 등을 대상으로 끔찍한 학살을 저질렀다. 이후엔 일본 정부가 사건을 은폐하면서, 100년이 지나도록 정확한 학살의 원인과 희생자의 규모가 파악되지 못하고 있다.

침묵의 공범은 한국 정부다. 역사 문제엔 눈 감은 채 한-일 관계 개선에 ‘올인’ 중인 윤석열 정부는 ‘학살 100주년’이라는 중요한 계기가 마련됐는데도 진상 규명과 사죄에 대한 어떤 요구도 내놓지 않았다. 그러자 일본 정부도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마쓰노 히로카즈 관방장관)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 하는데 그쳤다.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 역시 역대 도지사들이 해마다 보냈던 조선인 희생자를 위한 추도문을 올해도 보내지 않았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 정도가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 주최한 희생자 추모식에 참석한 뒤 기자들과 만나 “나쁜 일을 한 것에 대해선 정부가 책임을 다해야 한다”며 “그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도쿄/김소연 특파원 dand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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