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땅 텍사스에 별처럼 빛나는 작은 미술관들
한여름 낮 기온 42도,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는 미국 텍사스. 황량한 사막에서 말을 타고 다니는 서부 영화 속 카우보이의 고향이자, 미국에서 인구수로 4·5대 규모인 댈러스·포트워스, 휴스턴 등 대도시가 위치한 남부의 중심지. 주 면적은 우리나라의 7배에 달하며, 땅을 비롯한 '모든 것의 규모가 크다(Everything is bigger in Texas)'는 곳.
텍사스를 수식하는 말은 많지만 20세기를 거치며 '예술의 도시'라는 말도 빼놓을 수 없게 됐다. 풍요로운 '석유 머니'를 기반으로 아름다운 건축물과 공들인 컬렉션이 주목받고 있어서다. 일찍이 2021년 방탄소년단(BTS) 리더이자 미술 애호가 RM이 텍사스미술관 투어 흔적을 소셜미디어에 남기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텍사스에 간다면 포트워스는 꼭 방문해야 할 도시다. 댈러스 서쪽에 위치하며 우리나라와 직항 항공기로 연결돼 있다. 도시명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지난해 우리나라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최연소 우승을 거머쥔 밴 클라이번 콩쿠르가 4년마다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또 많은 미술관이 '문화지구'에 수준급 조경·수경을 갖추고 모여 있어 유유히 머물기 좋다.
먼저 이 지역을 대표하는 킴벨미술관은 근대 건축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성공한 사업가 케이 킴벨과 그의 아내 벨마 가족이 1936년 설립한 재단에서 시작됐다. 킴벨 부부는 재단에 '포트워스에서 제일 가는 박물관을 만들라'며 유산을 남겼다. 그 결과 1972년 건축가 루이스 칸이 지은 현재 건물이 탄생했다. 이어 2013년 마주 보고 지어진 렌초 피아노 파빌리온까지 2개 건물에 작품 350여 점이 소장돼 있다. 대형 박물관에 비하면 규모는 작지만, 그림마다 상세한 작품 배경 설명 등 관람객 친화적인 배려가 곳곳에 배어 있다. 이곳엔 특히 미켈란젤로의 1487년 작 '성 안토니의 고난'이 소장돼 있다. 미켈란젤로가 12~13세 무렵에 그린, 그의 회화로는 최초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칸의 킴벨미술관이 위대한 건 혁신적인 빛의 사용 때문이다. 칸 스스로 "빛이 주제"라고 말했을 정도로 건물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자연광이 아치형 볼트 중앙 부분의 좁은 틈을 따라 들어오고, 볼트 표면의 콘크리트에 닿는다. 여기에서 다시 반사된 빛이 예술 작품에 미묘한 조명으로 작용한다. 건물 외관은 마치 비닐하우스가 나란히 서 있는 듯한 단조로운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내부는 가벽을 활용해 다채로운 전시 공간으로 변모한다.
또 다른 건축 거장 안도 다다오가 지은 모던 아트 뮤지엄 오프 포트워스(더모던)도 포트워스의 자랑이다. 19세기 말 지어진 텍사스에서 가장 오래된 박물관으로, 2002년에 지금 모습이 됐다. 안도는 한 인터뷰에서 "이 용지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지형이 아니라 킴벨미술관이 가까이에 있다는 점"이라며 "근대 미술관 전시실 대부분이 킴벨의 전시실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밝힌 바 있다. 내부엔 작은 비밀의 방 같은 공간이 곳곳에 있어 둘러보는 재미를 극대화한다. 회화, 사진, 설치미술 작품 등 3000여 점을 소장 중이다. 더모던은 동시대의 다양성을 고려한 수준 높은 기획전을 연다. 이달 17일까지는 로버트 머더웰 특별전, 11월 26일까지 흑인 작가 제이미 홈스 전시 등이 진행 중이다. 특히 제이미 홈스 전은 작가의 첫 단독 전시로, 인종 문제가 얽혀 있던 어린 시절이나 가족, 애도 등 자전적인 소재를 담고 있다. 2020년 흑인운동의 도화선이 된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을 계기로, 플로이드의 유언을 하늘에 띄우는 작품을 공개해 주목받았다.
포트워스에서 남쪽으로 430여 ㎞ 떨어진 대도시 휴스턴에선 에너지 재벌의 컬렉션을 만날 수 있다. 석유 가스 기업 슐럼버거(SLB) 집안의 도미니크 드 메닐과 그 남편 존 드 메닐이 만든 미술관 '메닐 컬렉션'이다. 조용한 주택가 한복판에 주변과 조화를 이루며 낮게 위치한 단층 건물은 1987년 건축 거장 렌초 피아노가 지었다.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 미국 뉴욕 휘트니미술관 등도 디자인한 인물이다.
킴벨미술관과 마찬가지로 남부 뙤약볕을 자연광으로 받아들인다. 단 직사광선이 아닌 굴절된 빛이 들어올 수 있게 곡선 형태의 사선 패널로 설계한 천장 '리프'(잎) 구조가 특징이다. 1만8000점에 달하는 컬렉션 중 특히 초현실주의 작가 막스 에른스트, 르네 마그리트 등의 작품은 각각 수십 점이 한 방 전체를 에워싸고 있다. 메닐 컬렉션은 이 밖에도 사이 트웜블리 작품만 모아둔 작은 갤러리 건물을 비롯해 드로잉 인스티튜트, 비스트로 메닐, 메닐 파크 등 여러 블록에 걸쳐 '메닐 타운'을 확장해 가고 있다. 앞서 RM도 메닐 파크 등에서 인증샷을 남겼다.
이곳에서 도보 3분 거리엔 '로스코 예배당'이 있다. 이 역시 메닐 부부의 후원으로, 미국 건축가 필립 존슨 등이 1971년 완성했다. 추상표현주의 대가 마크 로스코 그림 14점만 걸려 있는 공간이다. 로스코가 예배당을 위해 그린 그림들인데, 정작 그는 1970년 세상을 떠났기에 작품이 설치된 모습은 보지 못했다.
그림은 각각 적갈색, 초록색 혹은 보라색 등이 섞인 어두운 빛깔이다. 로스코 특유의 초월감을 선사한다. 손을 댄다면 당장 검정이 묻어나올 것처럼 생생한데,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한 암흑이자 무언가 태동할 것 같은 시원이 느껴진다. 작품에 곧바로 빠져들진 않더라도 벤치와 쿠션 등에 앉아 감상, 명상, 독서, 휴식 등 조용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예배당 바로 앞엔 권력의 성쇠와 탈권위를 상징하는 바넷 뉴먼의 조각 '부러진 오벨리스크'가 서 있다.
휴스턴의 명문 사립대인 라이스대 캠퍼스 한복판에는 설치미술의 거장 제임스 터렐의 '스카이 스페이스' 시리즈 중 하나인 '트와일라잇 에피파니'도 있다. 최대 12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규모로, 우주선 같기도 하고 제단 같기도 한 의뭉스러운 존재감을 뽐낸다. 이 시설의 비밀은 새벽 동이 틀 때, 혹은 해가 어스름 지기 시작할 때 드러난다. 2층에 설치된 LED 색조명이 네모난 흰 천장을 비추고, 가운데 뚫린 구멍을 통해 시시각각 색이 변하는 하늘을 감상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원주 뮤지엄 산 등에도 같은 시리즈 작품이 있지만, 완전한 야외에서 거대한 규모로 체험하는 느낌은 또 색다르다.
이 밖에 휴스턴에선 또 다른 거대한 컬렉션 '더 뮤지엄 오브 파인 아츠, 휴스턴(MFAH)'을 들러야 한다. 무려 3개 건물에 걸쳐 있는데, 미국 내 박물관 캠퍼스로는 네 번째로 큰 규모다.
[휴스턴·포트워스 정주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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