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연의 책과 지성] "공산주의로 자본주의란 병을 치료할 수는 없다"
량치차오 (1873~1929)
량치차오(梁啓超)는 조선 개화파와 독립운동가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친 중국 사상가다. 언론인이자 학자였던 그는 세계는 약육강식의 현장이며 멸망을 피하려면 봉건사상에서 벗어나 국민을 계몽해 부국강병 길을 걸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설득력 있는 사상과 뛰어난 문장은 조선 근대 지식인들에게 시금석이 됐다. 특히 조선이 주권을 빼앗기기 시작한 무렵부터 조선 지식계에는 좌우를 가리지 않고 '량치차오 붐'이 일어났다.
안창호 등 근대 학교 설립자들은 량치차오 글을 교재로 사용했고, 신채호 장지연 박은식 최남선 등은 그의 책을 번역해 한국에 소개했다.
량치차오 사상을 딱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힘들다. 그는 폭넓은 근대주의자였다. 굳이 적당한 단어를 찾는다면 '실용주의'가 가장 가까울 듯싶다. 광둥성의 가난한 지식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전통 학문을 공부한 뒤 상하이로 가서 신학문을 공부하고 그곳에서 근대사상가인 캉유웨이 제자가 된다. 정계에도 잠시 발을 붙였던 그는 유럽을 여행하면서 받은 충격을 자신이 가진 학식과 조합시켜 특유의 실용주의 사상을 만들어냈다.
언뜻 보면 량치차오는 전형적인 국수주의적 우파 지식인이다. 량치차오는 중화민족이라는 개념의 창시자였다. 이 개념은 오늘날 중국이 다민족 거대 국가가 되는 이론적 배경이 됐다. 그는 미개한 '백성'을 개화된 '국민'으로 만들어 강국이 돼야 한다고 외친 계몽적 보수주의자였다. 동시에 그는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좌파적 시각도 가지고 있었다. 유럽을 두루 다녀온 그는 적자생존 자본주의의 혼란스러움과 1차대전의 참상을 보며 "문명에 의한 파괴가 더 야만적"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렇다고 그가 공산주의 편을 든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본주의라는 병을 공산주의라는 약으로 절대 고칠 수 없다"는 또 다른 명언을 남겼다. 량치차오는 완성된 사상가는 아니었다. 그는 전근대와 근대가 뒤섞여 있던 격동의 시대를 살면서 제3의 길을 고민한 실용주의 지식인일 뿐이었다. 그의 이름이 지금도 회자되는 건 그가 수많은 가치가 충돌하던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낸 지식인이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이런저런 글에서 량치차오 이름이 등장하는 걸 발견한다. 아마 지금 이 시대가 서로 다른 가치들이 첨예하게 충돌하는 시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혼란스러운 가치들이 서로를 속일 때는 실용주의가 절실하다.
흥미로운 건 량치차오가 조선과 조선인에 대해 비우호적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가 남긴 글에 이런 내용이 있다. "조선 사람은 미래 관념에 대하여 매우 박약하다. 한번 배부르면 서로 두셋이서 짝을 지어 차(茶)를 달이며 나무 그늘에서 쉬면서 한담으로 날을 보낸다. 내일은 어떻게 먹을 것을 구할까 하는 생계 문제를 계획하지 않는 고대(古代) 태평 시대의 사람과도 같다."
[허연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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