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가 보증한 유재선 감독…"'잠' 칸 진출, 모든 게 초현실적" [인터뷰]
아이즈 ize 김나라 기자
선선한 가을 바람과 함께 '괴물 신인' 감독 한 명이 침체기에 빠진 극장가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봉준호 키드' 유재선 감독이 그 주인공. 입봉작 '잠'으로 장르물의 묘미를 제대로 느끼게 하며 관객들에게 이름 세 글자를 똑똑히 각인시킬 전망이다.
'잠'은 행복한 신혼부부 현수(이선균)와 수진(정유미)의 평온했던 삶에 남편 현수의 수면 중 이상행동이 시작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 작품. 잠드는 순간 시작되는 끔찍한 공포의 비밀을 풀기 위해 애쓰는 두 사람의 고군분투가 긴장감 넘치게 그려진다. 유재선 감독이 연출과 각본을 맡았으며, 그는 잠이라는 일상적인 소재를 스릴러로 유니크하게 풀어내 웰메이드 장르물 탄생을 알렸다.
특히 유재선 감독은 봉준호 감독의 '옥자'(2017) 연출부 출신이자 이창동 감독 '버닝'(2018)에 영어 자막 번역 담당으로 참여했던 바, '세계적 거장' 감독들 밑에서 연출 내공을 다진 실력자다. 이에 '잠'은 제76회 칸국제영화제, 제56회 시체스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제48회 토론토 국제영화제 등 해외 유수 영화제에서 연이은 초청 릴레이를 받았다. 외신은 "유재선 감독이 봉준호, 이창동 등 최고 감독의 지도 아래 자신의 기술을 연마했다. '잠'은 그 영향의 흔적을 담은 매끄럽게 실현된 장르 영화"라고 일제히 주목했다.
봉준호 감독 역시 '잠'에 대해 "최근 10년간 본 영화 중 가장 유니크한 공포 영화이자 유재선 감독의 스마트한 데뷔 영화"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잠'의 작품성을 먼저 알아본 것도 봉준호 감독으로, 믿고 볼 수밖에 없다. 유재선 감독은 "연출팀에서 일하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언젠가는 감독으로 데뷔하고 싶은 꿈이 있다. 저도 봉준호 감독님의 새 프로젝트 참여를 앞두고 시나리오를 써봤는데 그게 '잠'이었다. 보통 연출팀은 감독님에게 배우고, 감독님은 연출팀 후배를 도와줄 수 있는 한 도와주는 시스템이라, 봉준호 감독님 차기작에 대해 얘기하려고 모인 자리에서 '잠' 대본을 드린 거다. 봉 감독님이 읽어보시더니 '너는 이거 해야겠다. 지금 당장 만들어도 손색없을 정도로 좋다. 넌 이 시나리오로 데뷔해야 할 것 같다'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덕분에 감사함과 용기를 얻었고 본격적으로 데뷔해야겠다는 확신을 받았다"고 뒷이야기를 밝혔다.
이뿐만 아니라, 봉준호 감독은 유재선 감독의 '캐스팅 1순위' 정유미와 이선균 섭외에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봉 감독이 두 배우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잠'을 적극 추천한 것. 이선균과 정유미 모두 "'잠' 시나리오를 정말 재밌게 읽었지만, 출연 선택에 봉준호 감독님의 영향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라고 전한 바 있다.
유재선 감독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봉준호 감독님 작품들이고, 가장 닮고 싶고 존경하는 감독님도 봉준호 감독님이다. '잠'을 봐주신 것만으로도 초현실적으로 감사한데 높게 평가해 주시기까지 해서 무척 영광이었다"라고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봉준호 감독에게 배운 경험들을 밑거름으로 데뷔작부터 군더더기 없이 완벽한 완성도의 '잠'을 만들어낸 유재선 감독. 그는 "국제대학(연세대학교 언더우드국제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영화과를 못 나왔지만 학교에 비공식 영화 동아리가 있었다. 영화랑 전혀 상관없는 전공들이 모여서 저희 딴에는 매 학기 열심히 단편영화를 제작했다. 그래서 영화 만들기는 어깨너머로 배운 게 전부다. 대학 시절엔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2013) 연출팀에서 일했고, 졸업하자마자 연출팀 막내로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작품이 봉준호 감독님의 '옥자'였다. 당시엔 '내가 이 영화의 발목을 잡으면 안 돼, 실수하면 안 돼' 걱정만 앞서서 뭔가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전혀 못했다"라고 영화감독의 꿈을 이루기까지 밟아온 길을 떠올렸다.
이어 "근데 막상 첫 연출작 '잠'을 시작하니까 알게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봉준호 감독님이 '옥자'에서 연출하셨던 모습을 모사하려는 제 자신을 발견했다(웃음). 봉준호 감독님의 영향을 받은 그 중 한 가지는 스토리보드에 대한 중요성이었다. '옥자' 때 최소한 제가 관찰한 모습이 그랬어서,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강박적으로 느껴졌나 보다. 그래서 투자, 캐스팅이 진행되기도 전에 시나리오를 완성하자마자 제 버전의 스토리보드를 그렸고 촬영 때도 최대한 이를 따르려 했다. 아무래도 요즘 한국영화의 예산이 빠듯한 경우가 많으니까, 그런 점에서 효율적 촬영에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다"라고 말했다.
유재선 감독은 '잠'에 '봉준호 키드'다운 남다른 재능을 발휘, 결국 입봉작으로 세계 최고 권위의 칸국제영화제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는 "새벽 시간에 제작사로부터 칸 초청 소식을 처음 들었는데 굉장히 기뻤다. 칸에 갈 거라곤 정말 예상을 못 했고, 사실 예상 못 한 것투성이었다. 시나리오가 투자 받을 예상도 못 했고, 캐스팅도 이 정도로 완벽하게 될 줄 예상조차 못 했다. 언제나 영화라는 건 후반작업까지 다 해야 알 수 있는 거니까. 완성될 줄도 몰랐는데 심지어 칸까지 가게 되다니,일이 아주 잘 풀린 케이스였다. 정말 모든 기적, 모든 운을 이 작품에 다 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라고 감격스러워했다.
게다가 '잠'은 전 세계 영화인들로부터 뜨거운 호평을 이끌어낸 바. 유재선 감독은 "모든 게 정말 초현실적이었다. 사실 칸 초청이 됐다는 말에 굉장히 기쁘긴 했지만 1시간도 안 돼서 걱정으로 교체되었다. 제 데뷔작을 전 세계 영화인들이 어떻게 바라볼까 두려움이 컸다. 재미없으면 어떡하지, 거품이라고 하면 어떡하나, 걱정과 두려움이 있었고 동일한 악몽도 여러 번 꿨다. 칸 상영 직전 대기 중, 배급사 해외팀이 '너무 마음 상하지 말고 들어라. 지금 평이 좋지는 않다. 영화가 다 좋을 수는 없으니까, 이걸로 너무 상심 말고 앞으로 잘 해보자'라는 따뜻한 위로를 받는 꿈이었는데 저한테는 악몽이었다. 눈을 뜨면 꿈인지 현실인지 판단 안 될 정도로 정말 리얼했다. 예지몽인가 할 정도로 두려웠는데 실제로는 다행히 상영하고 나서 관객분들 반응이 좋아서 너무나도 안도했던 기억이 난다"라고 얘기했다.
그러면서 그는 "해외 반응이 좋아서 감사했지만, 아무래도 '잠'은 한국 관객을 염두에 두고 그분들이 재밌게 보기 위해 만든 작품이기에 그분들의 반응이 가장 중요하다. 대중이 어떻게 바라볼지 그것만큼 중요한 게 없다"라고 떨리는 심경을 드러냈다.
정유미, 이선균과 작업 소회는 어떨까. 유재선 감독은 "정말 좋았다"라며 "제가 가진 걱정은 두 분은 한국에서 베테랑 배우이신데 저는 데뷔하는 감독이지 않나. 데뷔 감독이라 현장 경험이 없는 게 너무 당연한데, 이 경험의 미숙함이 첫 촬영 돌입 전까지 콤플렉스였다. 이런 제 미숙함 때문에 배우분들이 진지하게 안 봐주면 어떡하나 싶었는데 기우 같은 걱정이었다. 정유미와 이선균 모두 엄청난 협력자였고 연기는 말할 것도 없었다. 정말 최고의 캐스팅이었다. 좋은 감독을 이뤄주실 만큼, 두 분이 저를 이 작품의 감독으로서 완전히 존중해 주시고 캐릭터와 관련하여 아이디어도 많이 내주셨다"라고 고마워했다.
'잠'의 출발에 대해선 "시나리오를 썼을 당시에 현재 아내와 결혼을 앞둔 상황이었다. 저도 모르게 그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화두들이 이야기 속에 녹아든 거다. 그래서 주인공을 신혼부부로 설정한 것이고, 이야기 자체도 부부에 치중했다. 부부 단위로서 문제가 닥쳤을 때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과연 좋은 부부 관계란 무엇인가 하는 테마들에 관해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이게 저한테는 '잠'에서 중요한 포인트이지만 관객분들에겐 그보다 러닝타임 약 1시간 반 동안 1분 1초가 다 재밌었다, 시간도 돈도 아깝지 않은 그런 영화가 되길 바랄 따름이다. 재밌는 장르 영화를 만드는 게 최우선의 목적이었으니까. 그렇게 된다면 성공 그 이상을 해낸 게 아닐까 싶다"라고 답했다.
또한 유재선 감독은 "아내가 '잠'에 대한 아이디어를 많이 줬다. 이 작품엔 저 자신과 아내를 많이 대입했다. 아내의 결혼관이 수진과 유사하다고 본다. '잠' 대본을 쓸 때 저와 아내의 관계도 현수, 수진 부부와 굉장히 닮아있었다. 그때 저도 무직이었고 미래가 밝지 않았다. 그에 비해 제 아내는 경제적, 사회적으로도 저보다 훨씬 커리어가 잘 쌓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저도 무명배우인 현수처럼 의기소침한 적이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제 아내는 수진이 현수에게 말했듯이 '둘이 함께라면 극복하지 못할 문제는 없다'라는 말을 해주었다. 저는 어떤 경우엔 심지어 '왜 내 아내는 나 같은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 했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수진의 그 대사가 보시는 분들에겐 강요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저 개인적으론 강요, 억지가 아니다"라고 진정성을 엿보게 했다.
'몽유병' 소재를 '잠'에 흥미롭게 녹여낸 부분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유재선 감독은 "원래는 몽유병 소재가 먼저 찾아왔다. 어디선가 들어본 호러영화 소재이지 않나. 누구나 인터넷 상이라든지 극단적 괴담을 들어본 적이 있을 거다. 베란다 밖에 뛰어내린다든지 수면 중에 운전을 한다든지 자는 도중에 침대 옆에 있는 배우자를 해한다든지 등등. 그 자극에 흥미를 느껴 몽유병 환자들의 일상에 관한 궁금증이 생겼고, 더 중요한 건 이들의 가족 일상은 어떤 모습일까 싶더라. 왜 유독 관심이 갔냐면 보통 이런 공포물 같은 경우 주인공이 공포의 대상, 위협의 대상으로부터 도망가고 멀어지는 구조이지 않나. 근데 몽유병을 소재로 한다면 이와 다르게 본인을 위협하는 대상이 한편으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고 지켜주고 싶은 존재이기에 도망갈 수 없는 구조가 된다. 오히려 공포의 대상과 자의적으로 함께해야 하는 상황이라 그런 점이 흥미로웠다"라고 전했다.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며 결말까지 예측 불가의 재미를 안기는 '잠'. 이에 대해 유재선 감독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님이 한 인터뷰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었다. 아무리 기승전결까지 아웃라인을 빽빽, 꼼꼼하게 채워도 막상 시나리오를 쓰다 보면 중간 어디에선가 이탈하게 된다고. 이번에 '잠'을 만들며 정확히 공감했다(웃음). 제1장, 2장을 구분하여 쓰면서 3장의 윤곽이 그제야 드러났고 그때 엔딩에 대한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영화는 관객의 소유이기에, 각자 해석이 틀렸다고 생각 않고 전부 다 타당하다고 본다. 제 해석을 말씀드림으로써 그들 해석의 문을 닫고 싶지 않다. '잠' 속에서 수진과 현수도 훗날 둘 다 이성을 찾았을 때쯤 한 번쯤 지난 이야기들을 되새기면서 본인들이 했던 생각들과 확신들을 의심해 볼 거 같다. 관객들도 극 중 수진과 현수처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누가 맞고 틀린 것인가 활발하게 나눴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을 이야기했다.
높은 관심을 받고 있는 만큼, 앞으로의 행보에 부담감은 없을까. 유재선 감독은 "차기작에 대한 부담보다 기회가 생긴다는 가능성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부담의 전제는 '차기작을 만들 수 있다'라는 거니까, 기회가 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고 좋을 것 같다. 영화를 연출할 수만 있다면, 그 자체로 엄청나게 큰 복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몇 가지 아이디어는 있는데 일단 '잠'이 개봉하고 모든 홍보 일정을 충실히 수행한 다음에 한풀 꺾이면 써보려 한다. 하나는 미스터리 범죄물이고 다른 하나는 로맨틱 코미디물인데 저를 아는 모든 사람이 미스터리 범죄물을 먼저 준비해 보라고 그러더라"라며 웃어 보였다.
'봉준호 제자' 유재선 감독의 입봉작 '잠'은 오는 6일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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