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속에 태어난 음악이 준 위로…류재준의 '미사 솔렘니스'
정교한 음악 속 예고없이 폭발하는 감정…고통·평화 대비시키며 몰입감 선사
(서울=연합뉴스) 이용숙 객원기자 = 지난달 30일 칼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에 이어 31일 작곡가 류재준의 '미사 솔렘니스'(Missa Solemnis·장엄미사) 세계 초연이 열린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은 거의 만석이었다.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곡 등 다양한 장르에서 비범한 예술적 성과를 거뒀고 합창이 포함된 '진혼교향곡'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작곡가의 초연작에 대한 관심은 뜨거웠다.
류재준의 '미사 솔렘니스'는 2017년에 구상을 시작해 지난해 국립합창단의 위촉으로 마침내 완성한 대작이다.
베토벤을 비롯해 여러 시대 작곡가가 작곡한 '미사 솔렘니스'는 가톨릭교회의 미사 통상문을 가사로 사용하고 있다. 류재준의 작품 역시 '키리에-글로리아-크레도-상투스-아뉴스 데이'의 순서로 배열된 라틴어 가사를 사용했고, 원문을 의역한 번역 자막을 제공했다.
현대음악의 난해함을 두려워하는 청중 대부분은 자비를 구하는 기도인 첫 곡 '키리에'가 시작됐을 때 듣기 수월한 곡이라 여기고 안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류재준은 신(新)바로크 풍의 정교하고 전아한 음악 속에 예고 없이 폭발하는 감정의 폭탄을 심어놨다. 바닷속 소용돌이처럼 격렬한 '(그리스도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가사에는 자비를 구하는 이들의 깊은 고통과 간절함을 드러냈다.
류재준은 일반적으로 밝고 화려하게 출발하는 영광송인 '글로리아'에서 처연한 도입을 택했다. '그의 영광 크시기에 감사하나이다'를 노래하는 독창자의 느리고 서정적인 가창에 통상의 '글로리아'와 차별화된 탄원의 정서를 담았다. 후반부에서 음악은 장엄하고 격렬해지지만, 절대자의 영광에 대한 찬미보다는 '미제레레 노비스'(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가사에 방점을 찍었다. 세상의 온갖 전쟁과 기아와 사고로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에게 이 작품을 바친다는 작곡가의 뜻이 그대로 묻어났다.
신앙을 고백하는 기도인 '크레도'에서도 신앙은 강조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크레도'에서 가장 극적으로 묘사되는 '십자가 처형과 부활'이라는 핵심 사건을 알토 독창자가 어머니처럼 깊고 따뜻한 음색으로 전달하는 것도 기대지평을 뛰어넘는 시도였다. 메조소프라노 김정미의 악상을 살리는 섬세한 표현력도 빛났다.
거룩함을 찬미하는 '상투스'는 속삭이는 듯한 합창으로 시작됐다. 저음 현악기들이 하바네라(쿠바에서 생겨나 스페인에서 유행한 민속 춤곡) 풍의 리듬을 강박적으로 반복했다. 그 위에 성악 선율이 펼쳐지면서 가장 강렬한 외침 '호산나'에 도달했다. 후반부 '베네딕투스' 부분은 앞부분과 대비를 이루는 밝고 순정한 느낌이었다.
마지막 곡 '아뉴스 데이'에서는 소프라노 이명주의 투명한 고음과 해석력이 더욱 돋보였다.
80분에 달하는 이 대작은 조성음악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여, 현대음악에 익숙하지 않은 청중에게도 감상의 기쁨과 즐거움을 안겼다. 결코 끝나지 않을 듯한 강렬한 고통과 천상의 빛 같은 평화를 대비시키며 시시각각 예상을 뛰어넘는 경지를 펼쳐 보인 음악은 청중을 몰입시켰다. 각 곡의 '아멘' 등 마무리 부분에서 베토벤을 오마주한 듯한 악상도 눈에 띄었다.
윤의중 단장이 이끈 국립합창단과 시흥시립합창단, 솔리스트들과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는 이 작품의 역동성을 효과적으로 살려내며 가사와 음악 간의 조화와 긴장을 탁월하게 구현했다. 테너 국윤종의 정확하고 단단한 가창, 베이스바리톤 김재일의 깊이 있는 곡 해석도 공연에 활력을 더했다.
베토벤은 청력을 완전히 잃고 병고로 시달리며 장시간 작곡이 불가능했던 시기에 '미사 솔렘니스'를 작곡했다. 류재준 역시 림프종 투병의 고통과 좌절 속에서 이 작품을 시작했다.
"고통 속에서 태어난 음악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위로한다"는 베토벤의 말을 실감할 수 있는 공연이었다. 유튜브에서 전곡 공연 영상을 볼 수 있다.
rosina@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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