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 최대 주주 메디치(下) [최정봉의 대박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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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5년 즉위한 바오로 4세는 방키(banchi)에 대한 적개심이 강했다. 교황 선거 도중 그가 사망했다는 악의적 루머를 퍼뜨렸기 때문이다. 유언비어 유포자들은 색출됐고 재산 압류와 함께 교수대에 묶이는 가혹한 형벌을 받았다.
16세기 중엽까지 방키에 대한 바티칸의 공격은 상징적이고 전시적인 행정이었다. 왕족과 대부호들이 방키 은행의 배후였고 또 바티칸 실세들은 이들과 친혈족 관계에 있었으니 자기 발등을 찍을 수 없었다. 방키와 바티칸의 공생 관계에 큰 변동이 생긴 것은 16세기 말엽이었다.
방키 대공습
방키에 대한 체계적 단속은 교황 식스토 5세부터 시작됐다. 1587년부터 2년간 수차례에 걸쳐 칙령을 발표하는데 먼저 추기경 승격에 대한 베팅을 엄금했다. 또 태아 성별에 대한 베팅(maschio et femina)도 금지됐지만 풍속의 일부였던지라 엄격한 단속은 면했다.
식스토 5세의 가장 선명한 정책은 교황청 ‘공인 브로커’라는 유인책이었다. 공식 브로커 30개소를 지정해 도박 세력들을 제도권 틀 안에 뒀다. 그 외 업소는 모두 불법화했다. 적발된 업소와 해당 투기자들은 500스쿠디의 벌금과 5년간의 강제 노역을 선고받았다. 형평성 논란이 불가피했다.
브로커들은 “투기에 간여한 교회와 귀족층은 방치하고 상인과 군소 금융업자만 정조준한 탄압”이라고 반발했다. 또 비공인 브로커를 소탕해 방키 주류의 독점권을 강화하려는 기만책이라고 비난했다. 교회 내부의 잡음도 비등했다. 교황 선거에 대한 방키의 도박적 개입을 승인하는 꼼수 아니냐는 항의였다.
1590년 즉위한 교황 우르바노 7세는 보다 선명한 노선을 취했다. 교회 내 금연 조치로도 잘 알려진 그는 가톨릭 교회의 족벌주의와 정실 인사 척결을 공표했다. 하지만 허무하게도 즉위 12일 만에 말라리아로 사망했고 급작스러운 궐석 탓에 방키 소탕은 로마시 총독과 몇몇 추기경에게 넘겨졌다.
지오바니 마테우치는 강경했다. 수차례 방키 지구 급습에 나선 그는 우르바노 7세의 노선을 승계해 신분과 연고를 묵살했다. 발행된 베팅 쿠폰들을 압수하고 미등록 브로커들을 연행했으며 배후 연루자 명단을 확보하기 위해 잔인한 공개 고문도 서슴지 않았다.
공방전
방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대중 언론 격인 뉴스레터를 통해 “이런 무차별적 공격은 다수의 영주, 주교 그리고 추기경들까지 희생시킬 것”이라며 압박했고 총독 마테우치의 부패 루머를 퍼뜨려 자격 시비를 부추겼다.
“무분별한 단속은 정보 공유와 토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다. 시장의 자유를 억압할 뿐만 아니라 피렌체와 나폴리 등 여타 이탈리아 지역으로 부를 유출시킬 것”이라는 외침에서는 현대 사회의 시장 자유주의의 맹아도 엿보인다.
총독 마테우치의 전면 탄압은 풍선 효과를 낳았다. 1만 스쿠디의 보석금으로 석방된 브로커들 상당수는 게릴라형 투기로 전환했다. 행정 당국과 교황청을 조롱이라도 하듯 방키 척결에 앞선 스포르자 추기경 소유의 휴양지에서 비밀 캠프를 운영했다.
다음 캠프지는 친교황파 오르시니(Orsini) 가문의 와인 농장, 그다음은 친프랑스 왕정파 콜로나(Colonna) 가문의 별장이었다. ‘초호화’ 게릴라전은 방키 은행가의 자금줄이자 교황 선출 투기에 진심이었던 로마 상류층들의 은밀한 협조를 뜻했다. 총독 주도의 단속이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밀라노 출신 교황 그레고리오 14세는 극약 처방을 강구했다. 교황 선출을 “신과 접속하는 영적인 행사”로, 방키의 도박을 “시장의 가장 저질스러운 습성”으로 규정한 그는 1591년 3월 21일부터 교황의 전 영지에서 일체의 선거 관련 도박을 금하는 교서(Bull Cogit Nos)를 발부했다.
교서는 추기경 선발을 비롯해 교황 재위 기간, 교황 선출 일정, 상위 후보군, 결과 발표 일자, 최종 선출자 등 다양한 투기를 구체적으로 언급해 도주로를 차단했다. 교서를 어기고 적발된 자는 파문과 영구 추방에 처한다는 강도 높은 처벌도 주효했다.
방키의 몰락과 공판 기록
투기 행위뿐만 아니라 루머와 정보 유통에 간여한 자 모두를 파문 대상으로 선포한 것은 방키에 치명타였다. 이 공포의 교서가 교황 영지 내 모든 성문·교회·주점에 나붙자 방키를 지탱하던 정보의 모세 혈관들이 괴사하기 시작했다. 방키의 심장 대신 수족 혈류를 차단한 묘수였다.
교서의 위력은 6개월 후 실시된 교황 선거에서 확인됐다. 방키 지구는 와해됐고 일부 상인·장인·군인들만 술집이나 개인 집에서 소규모 투전으로 소일했다. 1592년 교황 귈위 선거를 지켜본 베니스 대사 지오반니 모로는 “교황 선거나 추기경 승격 도박 대신 주사위·카드·축구·테니스 같은 일상적 도박만 기승을 부린다”는 보고서를 본국에 발송했다.
대규모 단속 후에도 검거자들에 대한 재판이 이어지면서 공포 분위기가 지속됐다. 1590년 10월 교황 선거 공판 기록에 따르면 연행된 투기꾼 중에는 추기경의 종복들 심지어 교회 신부들도 끼어 있었다. 상인·금융업자·귀족층 이외에도 재단사·석공·대장장이 등 장인 계층도 26%를 차지했다.
평민이나 기술공들의 베팅 규모는 약소했지만 부유 상인들과 상류층은 달랐다. 식기 판매상 세울리 방치에리는 1550년 율리오 3세 교황 선거에서 2만 스쿠디를 벌었고 1590년 선거에서 산타 세베리나 추기경에게 거금을 걸었던 금융업자 5인은 파산에 직면했다.
회부된 방키 브로커는 △의류업자, 향신료 거래상, 약재상 등 부유 상인 △사채업을 담당한 유대인 △전체 30% 이상을 차지한 피렌체와 투스카니 출신 금융업자로 분류된다. 로마시와 유대인 브로커 상당수가 셋째 그룹과 연계된 것을 감안하면 방키의 지배력은 피렌체·투스카니 은행들이 쥐고 있었음이 명백하다.
바티칸을 품은 메디치
방키의 등장은 16세기 초입이었고 쇠락은 16세기 말이었다. 왜 하필 16세기였을까. 방키는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된 불량한 자금의 결집이었을까. 그 해답은 15~16세기 전성기를 누린 메디치가의 헤게모니에 있다.
먼저 방키와 메디치의 재정 커넥션을 보자. 1397년 설립된 메디치은행(Banco dei Medici)은 1402년 로마를 포함한 교황 영지 곳곳에 지점을 두며 유럽 최대 금융가로 성장했다. 위세를 떨치던 메디치은행은 정세 불안과 재정난으로 1494년 돌연 영업을 중단했다.
앞서 메디치의 라이벌이었던 파치가(Pazzi Family) 소유의 은행도 문을 닫았다. 두 거대 금융가에 묶여 있던 돈들은 어디로 유입됐을까. 그 상당 부분은 바티칸의 선거 투기 자금으로 헤쳐 모였다. 15세기 말 방키는 그렇게 탄생했다. 제도권을 이탈한 돈은 영주의 통제를 벗어난 무사처럼 거칠었다. 투자 대신 투기를, 이자 대신 대박을 추구했다.
둘째, 메디치와 바티칸의 인적 상관관계다. 메디치가는 독실한 가톨릭이었고 바티칸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바티칸 궁전과 성 베드로 대성당을 포함한 랜드마크 건설 자금을 지원했고 교황과 가톨릭 교회의 사금고 역할도 맡아 왔다.
물론 원금과 이자 수거는 시간차를 두고 전개됐다. 15세기 메디치의 ‘헌금’은 16세기에 이르러 결실을 봤다. 16세기 교황 중 무려 4명이 메디치가 출신이었다. 레오 10세와 클레멘스 7세는 직계, 비우 4세와 레오 11세는 방계였다. 교황 이외에 수많은 추기경들과 두 명의 프랑스 여왕도 배출했다.
요컨대 16세기 바티칸은 메디치였고 메디치가 바티칸이었다. 도플갱어(doppelganger)가 아니라면 적어도 동위 원소였다. 그런 메디치가 자신의 ‘가업’이었던 교황 선출을 방관할 수 있었을까. 방키의 자금과 정보력을 동원해 교황청을 감시하고 교황 선거와 추기경 임명에 개입한 것이 오히려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빌런과 영웅
“16세기 말 교황청의 반격으로 방키는 소멸했다.” 다수의 사가들은 이렇게 기술한다. 필자의 해석은 다르다. “나를 만든 것도, 나를 망친 것도 메디치였다”라고 말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말을 패러디해 보자. 방키를 만든 것도, 방키를 망친 것도 메디치였다.
몰락은 메디치 쇠퇴의 징후이자 결과였다. 16세기 말 교황청 내 메디치의 입지가 약화됐고 그만큼 비(非)메디치 경쟁 세력이 득세했다. 교황청에 대한 메디치의 감시·첩보·공작 기관 역할을 한 방키를 가만둘 리 없었다.
그래서 교황 선거 투기를 주도한 방키를 빌런(villain)이라고 할 수도, 이에 맞선 바티칸을 영웅이라고 할 수도 없다. 방키와 메디치를 밀어낸 후에도 바티칸은 유럽 최상의 지배층으로 현세 권력과 결탁해 왔다. 종교 개혁의 불길이 거셀 수밖에 없었다.
최정봉 문화평론가, 전 NYU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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