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불행해야…" 칼 빼드는 성난 사람들, 사회 신뢰 시스템 무너뜨린다 [터치유]
"남도 불행해야…" 잇단 흉기난동에 사회 불안
망상엔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감정 내재
'은둔형 외톨이' 더 숨어들다 "인생 끝났다" 판단
결국 사회보호 시스템에 대한 신뢰 무너뜨려
편집자주
내 마음을 돌보는 것은 현대인의 숙제입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 이후엔 우울증세를 보인 한국인이 36.8%에 달하는 등 '코로나 블루'까지 더해졌죠. 마찬가지로 우울에피소드를 안고 살아가는 보통 사람, 기자가 살핀 마음 돌봄 이야기를 전합니다. 연재 구독, 혹은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취재, 체험, 르포, 인터뷰를 빠짐없이 보실 수 있습니다.
분노 사회의 시대다. 최근 잇따른 흉기난동 사건의 심리 밑바닥에는 타인 혹은 사회에 대한 분노와 자신에 대한 절망이라는 감정이 공통적으로 깔려 있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서 흉기난동 사건을 벌인 피의자 조선(33)은 "열심히 살아도 안 되더라, 남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싶었다"는 변명을 했다. 경기 성남시 분당구 서현역 흉기난동 사건 피의자 최원종(22)은 "사람을 죽여서 경찰의 관심을 끌고 싶었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한 직장인은 온라인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대한 자신의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불만을 품고 경찰관을 사칭해 살인예고 글을 올리기도 했다. 광주광역시의 한 20대는 지하철 바닥에 침을 뱉었다고 나무라는 역장에게 앙심을 품고 흉기를 휘둘렀다. 서울 은평구에서 흉기난동을 벌인 피의자는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게 속상해" 흉기를 들었다고 했다. 다행히 은평구와 광주에서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피의자들은 긴급 출동한 경찰과 실랑이 끝에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이렇듯 대한민국 사회 전체가 분노와 불안에 신음하고 있다. 흉기 소지 등 각종 오인 신고와 대피 소동도 이어지고 있다. 정부는 강력한 대응을 예고했고, 지자체들은 호신술 교육, 호신용품 제공 등 대책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불특정 다수를 향한 범죄에 대한 우리 주변의 공포는 쉽게 가라앉지 못하고 있다.
[에코의 마음청소]는 지난달 25일 오후 정정엽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미래전략특임이사를 만나 사회 전반의 분노와 불안 현상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정 이사는 2015년 의사들이 직접 기사를 작성하는 인터넷매체인 '정신의학신문'을 공동 창간한 바 있다.
"일반적 분노는 범죄로 이어지지 않아…감정 제어 고장 난 것"
정 이사는 "사회적 분위기가 분노로 묶인다고 하더라도 공격의 의도성은 다 다르기 때문에 우선 △범죄자들의 피해망상 △일반 시민이 느끼는 분노 △사이코패스 모두 다 분리해서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대개 사회에서 소외당한 것에 대한 상실감이나 배려받지 못했다는 배신감이 분노로 전환되는 건 맞으나, 일반적으로 받는 분노감으로는 폭력적인 행위들로까지 이어지지 않습니다. 강력한 감정인 분노는 내면에서 치솟아 오르는 게 당연하지만, 공격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기까지는 간격이 있습니다. 공동체,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 사회경제적인 요소 등이 공격성을 막아주는 역할을 해주죠.
정 이사는 분노가 범죄로 이어지는 메커니즘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생물학적으로 두뇌에서 '내가 이런 행동을 저질렀을 때 내가 무엇을 잃을지, 피해자가 아플지, 주변인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등을 떠오르게 하고, 그럴 때 분노도 제어하게 된다"고 전했다.
뇌에서 분노나 불안, 공포와 같은 감정을 담당하는 곳은 변연계인데, 여기서 공포나 분노가 막 올라오면 전전두엽에서 억제 및 조절시킵니다. 여기서 인과관계나 특정 행위가 나한테 이득이 되는지 안 되는지 등을 이성적으로 볼 수 있으면 감정도 제어할 수 있죠. 이 부분에 고장이 나면 감정적으로 거칠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피해의식이나 망상이 범죄로 이어지는 심리적 메커니즘은 뭘까.
정 이사는 "그런 사람들은 대개 '전쟁'과 같은 개념이 내재해 있는 경우가 많다"며 "그들의 주관적인 세상에서는 '나는 고립돼 있고 여기서 내가 남을 죽이지 않으면 남이 날 죽일 수 있다'는 사고가 박혀 있다"고 설명했다.
테러범들에게 '내가 이걸 저지르면 천국을 갈 수 있다'는 논리가 통하지 않는 잘못된 신념이 깔린 이유다. 그는 "이런 사람들에게는 어떤 근거를 대도 자신을 해한다는 믿음이 있다"고 덧붙였다.
"우울증은 억울증…분노 수치화하는 연습해야"
정 이사에게 이런 분노나 피해의식이 조현병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지 물었다. 그는 "조현병은 스트레스만으로 생기지 않는다. 생물학적, 심리학적, 사회학적 요인이 결합했다"며 "특히나 조현병의 경우 유전적인 요인이 강한데, 만약 부모 모두 조현병을 갖고 있다면 자녀의 발병률은 50%에 달한다"고 전했다.
그는 "조현병 환자 중 발병한 지 1년도 안 됐는데 범죄 같은 행위를 하는 사람은 없다"며 "대부분 발병한 지 오래됐는데 치료를 미루다가 심각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조현병 환자들의 범죄율은 일반인보다 5분의 1 수준으로 낮지만 중범죄 비율은 높다. 치료를 받지 않고 방치하다 보니 범죄의 심각도가 높아지는 셈이다.
'은둔형 외톨이'가 왜곡된 분노로 범죄를 저지르는 현상과 관련해서는 "인생에서 한번 삐끗하게 되면 한 단계 더 숨어들어 갈 수 있다. 계속 숨게 되면 당사자는 자기 나름대로 상황을 해석하게 된다"며 "분노의 감정을 그렇게 눌러 담다가 사건을 촉발한 사람과 주변인으로 분노가 확장되면서 '어차피 내 인생 끝났으니 저지르자'는 식으로 가버리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 이사는 우리 사회 전반에 쌓인 분노조절 현상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그는 "사회적으로 소외당하고 개인적인 트라우마가 있다면 분노가 쌓일 확률이 높다"며 "보통 이런 사람들은 분노를 느낄 때 곧바로 대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1, 2만큼의 분노를 받았을 때, 다른 사람들한테 받은 5, 6, 7 정도의 화풀이를 하는 경우가 생기는 이유다.
이런 문제에 대해 그는 "개인적으로는 분노를 수치화하는 연습도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분노를 얼마나 받았는지 수치화하고, 그것을 어떻게 지혜롭게 표현할지, 어떻게 건강한 해결책을 찾을지 등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경험이 쌓이면 분노의 화살이 잘못 향하지 않죠. 분노의 대상이 제대로 잡혀 있지 않으면 (분노는) 애꿎은 사람한테 가거나 자기 자신한테 옵니다. 우울증도 결국 분노와 관련이 있는 이유죠. 중국은 우울증을 '억울증'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상동기 범죄, 사회 보호 시스템에 대한 신뢰 무너뜨려"
'살인예고글'과 관련해서 정 이사는 "글을 게시해 주목받고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지만, 자신의 감정을 다루는 데 미숙한 사람들일 가능성도 높다"며 "분노나 불만을 세련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올리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이것을 올릴 때만 해도 처벌받을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못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시민들이 겪는 불안과 트라우마에 대해선 "사회적 불안은 대부분 '예기치 못했다는 점'에 있을 것"이라고 정 이사는 분석했다.
트라우마는 내가 보호받고 안전하다는 인식과 믿음을 통해 좋아집니다. 교통사고를 당하면 차도로 가도 인도로 가도 불안하죠. '저 차가 인도로 갑자기 들어오면 어떡하지'라는 그런 불안은 안전에 대한 믿음이 깨진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상동기 범죄는 그런 보호 시스템에 대한 신뢰 자체를 무너뜨리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치안 강화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회가 개인을 보호해 준다는 믿음을 줄 수 있기 때문이죠.
근본적으로는 사회적으로 자기와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정 전문의는 전했다.
그는 "만약 '정신과 전문의 정정엽'이라고 하면 보통 직업·학벌·재력 등을 나타내는 요소인 '정신과 전문의'에 집중한다"며 "하지만 어떤 한 개인을 나타내는 본질은 후자에 있고, 후자를 볼 줄 알게 되면 타인에 대한 존중이 가능해진다"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다양한 사회적 가치 존중을 통해 실패를 경험하는 이들이 다시 일어서는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저 사람은 왜 저런 생각을 하는지, 어떤 맥락에서 저런 얘기를 하는지 등을 볼 수 있게 되면 결국 '저 사람의 삶도 내 삶처럼 소중하구나,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등의 생각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시야가 넓어진다면 자살도 분노도 줄어들 게 되겠죠. 모두가 한 곳만 바라보니까 서로 경쟁하고, 그 경쟁에서 낙오되면 인생도 망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실패하고 고립된 이들이 어떻게 해서든 사회 속에서도 끈을 유지하며 살 수 있도록 하는 고민과 제도적 장치가 필요해요.
치유하는 터전, 터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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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치유'가 한국일보의 디지털 프로덕트 실험 조직인 'H랩(Lab)'과 함께 돌아왔습니다. 탐사선 H랩은 기존 뉴스 미디어의 한계선 너머의 새로운 기술과 독자, 무엇보다 새로운 성장 가능성과 만나려 합니다. H랩 시즌1 프로젝트인 '터치유'는 평범한 이웃의 비범한 고민 속, 마음 돌봄 이야기를 오디오 인터랙티브로 집중도 높게 들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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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성원 기자 sohns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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