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하는 ‘청춘예찬’, 2000년대생 밴드는 어리다고 주눅 들지 않는다 [차트 밖 K문화]
음원 TOP 100 차트인, TV 화제성 순위…. 매일 같이 쏟아지는 기사 제목입니다. 시선에서 자유로울 것 같은 예술계도 성공의 기준은 꽤 명확한 편입니다. 그럼 당장 순위권에 없는 이들은 어떨까요? ‘차트 밖 K문화’는 알려졌지만 알려지지 않은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연재물입니다. 유치할지라도 대놓고 진지하게, 이 시대 예술가들의 철학을 소개합니다. |
“이 밴드가 다른 밴드에 비해 갖고 있는 특장점은 무엇인가요?”
“어려요!”
밴드 ‘크리스피’의 답변은 명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밴드의 최고령자는 2001년생이다. 김승윤(보컬), 허민석(기타)이 2001년생, 신승호(베이스), 오장호(드럼), 하동준(피아노)은 2002년생이다.
지난달 16일, 서울 서대문구의 한 반지하 빌라. 벽과 바닥에는 방음재가 붙어있고, 여러 대의 기타와 전자 피아노, 스피커가 방 곳곳을 채우고 있었다. 작업실 바닥에 둥그렇게 앉은 이들 다섯 사이로 날것의 대화가 오갔다.
“멋있고 싶어서 악기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솔직한 고백부터 “어릴 때 너무 놀아 대서 뭐라도 하라는 가족의 권유에 음악을 배웠다”, “사람들이 저희 노래만 들었으면 좋겠다” 등등….
청춘이 스스로 청춘임을 알 때 드러낼 수 있는 기백이었다.
이들의 첫 만남은 그야말로 패기만만이다. 다섯이 처음 다 같이 모인 날은 2021년 5월 20일. 이날은 곧 밴드 결성일이 됐다. “밴드하고 싶다”는 승윤의 말에 고등학교 동창인 민석과 승호가 모였고, 민석의 대학 동기인 동준과 장호가 합류했다. 밴드 이름도 당일에 결정했다. 안면을 트며 치킨을 먹었다. 그래서 ‘Creespy’다. ‘Crispy’(바삭한)의 변주다.
갓 20대에 접어든 다섯 소년들 앞에는 숱한 갈등이 예고되어 있었다. 본래 좋아하는 음악마저 ‘재즈’(민석·장호), ‘밴드’(승윤), ‘알앤비’(동준), ‘팝’(승호)…. 각기 다른 다섯은 식사 메뉴를 고르는 것부터 크리스피의 색깔을 꾸려가는 과정까지 맞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냉전은 영원하지 않은 법. “울고불고 참 많이도 싸웠다”는 이들은 점차 융화되어갔다. 그러다 처음으로 모두의 취향을 만족시킨 밴드를 찾았다. 바로 영국의 록 밴드 ‘The 1975’다.
크리스피는 ‘The 1975’로부터 영향받았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The 1975’의 음악은 “누구 한 명 소외되지 않고 다섯 명 다 같이 즐기며 할 수 있는 음악”과 유사했기 때문이다. 음악적 동경만이 아니다. 이들은 “우린 민주주의면서 독재주의”라는 ‘The 1975’ 보컬 멤버 매튜 힐리의 말을 되새기며 “우리도 한 의견을 따라가기도 하고 다섯의 의견을 협의해나가기도 한다. 서로의 말을 잘 수용하는 법을 많이 배웠다”고 말한다.
이날 이후 이들은 여러 ‘처음’을 함께 경험해갔다. 작업실 하나를 빌려 같이 살다시피 했다. 밴드 결성 6개월쯤, 한 유통사에 데모곡을 첨부한 메일을 넣었고 다음 날 회신을 받았다. 데뷔곡 ‘dance party ballad’(2021년)은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음원 사이트에 곡이 발매되기 1시간 전, 이들은 당시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작업실에 모여 그들만의 음악 감상회를 열었다.
“5명이 앉으면 꽉 차는 비좁은 방이었어요. 곡이 발매되는 걸 보고 눈물을 머금었죠. 흘리진 않았어요. 애써 참았습니다. (웃음) 아, 이제 시작을 했으니 끝을 봐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출발선을 넘긴 다섯 청춘이 선택한 길은 “작가 시점으로 캐릭터의 이야기를 쓰기”였다. 크리스피는 가상 인물과 그가 처한 상황을 설정해놓고, 그 인물의 삶을 상상하며 곡을 만든다. 프로듀싱 멤버 중 한 명인 승윤은 “솔직히 아직 겪어본 일이 많지 않다. 제 이야기를 기반으로 곡을 쓰는 게 부끄럽기도 하다”며 꾸밈없이 말한다.
일례로 곡 ‘Hero’(2022년)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영감을 받았다. “히어로물 세계관에 저희 유년기를 태웠다”는 이들은 이 곡을 통해 영웅의 사랑 이야기를 그렸다. 곡 ‘daydreaming’(2023년)은 가제가 ‘소년 만화에서 살아남기’였다. 만화 속 여자주인공을 구하러 가는 남자주인공의 이야기다. ‘Ella’(2021년), ‘Ray’(2022년)의 곡 이름은 이들이 만든 가상의 캐릭터 이름을 본 따왔다.
하이틴스러운 미국 팝 멜로디에 재기발랄한 소재. 그 신선함을 무기로 이들은 빠르게 성장해왔다. 지난해 1월, 크리스피는 처음으로 무대에 섰다. 그 연합 무대가 끝난 후 처음 두 명의 팬이 생겼고 그해 10월, 밴드 결성 후 첫 목표였던 ‘롤링홀 단독 공연’을 성사시켰다. 올해에는 유명 인디 뮤지션 발굴 사업인 CJ 문화재단의 ‘튠업’에도 당선됐다.
“롤링홀 단독 공연, 기분이 날아갔죠. 2년은 걸릴 줄 알았거든요. ‘이제 ‘The 1975’처럼 될 일만 남았구나!’ 싶었어요.”
물론 언제나 명랑할 수만은 없다. 이들 또한 유쾌하지 않은 순간들을 마주한다. “곡 작업으로만 먹고살고 싶다”(승윤)는 꿈을 꾸기도 하고, “현재에 만족하다 보니 발전이 없는 느낌”(승호)을 받으며 스스로 채찍질도 해보고, “과한 욕심과 열정이 발전보다는 부정적인 생각에만 영향을 미쳐 행복하지 않았다”(동준)는 깊은 고민도 안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함께다. “밴드하지 말라”는 주변의 조언에도 결국 모인 이들이기에, 청춘의 미숙함과 고단함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어른스러움을 선망하며 주눅 들지도 않는다. 이 시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솔직함을 무기 삼아 모든 첫 순간들을 함께 대면해 왔다.
‘다양한 연령층이 있는 밴드 신에서 2000년대생 밴드로서 겁나는 상황은 없냐’는 질문에 다시 한 번, “전혀”라는 명쾌한 답을 내놓을 수 있는 힘이 여기 있다.
“오히려 더 시간이 흐르면 ‘나이에 안 맞게 어린 음악을 하는 것 아닌가’ 스스로 생각하게 될 것 같아요. 지금은 그런 부담 하나도 없어요.”(민석)
“저희의 열정과 단합력은 계속 갖고 가되, 겉의 색은 달라지지 않을까요? 세월에 맞춰서요. 지금은 지금 나름의 색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동준)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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