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가용비행기 공짜 탑승 미 ‘스폰서’ 대법관 “안전 위해” “악천후 탓에”
심각한 윤리 논란으로 미국 연방대법원을 궁지로 몰아넣은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이 억만장자의 자가용 비행기를 공짜로 이용한 사실을 신고했다. 신변 안전을 걱정해서라거나 악천후 때문이었다는 변명을 달았다.
토머스 대법관은 31일 공개된 연례 재산 공개 자료를 통해, 지난해 부동산 재벌 할런 크로의 자가용 비행기를 3차례 이용했다고 밝혔다. 공화당의 고액 후원자인 크로는 지난 20여년간 토머스 대법관의 스폰서 역할을 한 인물이다.
토머스 대법관은 이런 사실을 재산 공개 자료에 포함시키면서 일반적 관행과 달리 해명을 달았다. 그는 지난해 5월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열린 보수 싱크탱크 미국기업연구소 콘퍼런스에서 기조연설을 하려고 크로의 자가용 비행기를 탄 것은 신변 안전 때문이었다고 했다. 당시 여성의 임신중지를 헌법적 권리로 인정한 1973년 대법원 판례를 파기하는 내용의 판결 초안을 폴리티코가 보도해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며 “경호팀에서는 가능하다면 상업용 비행기는 타지 말라고 권고했다”고 주장했다. 이 판결에 찬동하는 자신이 테러 대상이 될까 봐 두려웠다는 변명이다.
토머스 대법관은 같은 해 2월에도 같은 장소에서 열린 미국기업연구소 콘퍼런스에 갈 때 크로의 자가용 비행기를 이용했다고 밝혔다. 그때는 “예상하지 못한 얼음 폭풍” 때문에 상업용 비행기를 이용하지 못하고 크로한테 신세를 졌다고 해명했다. 토머스 대법관이 참석한 두 콘퍼런스는 크로가 소유한 건물에서 열렸다. 토머스 대법관은 무료 식사도 제공받았다고 했다.
비난 여론에 괘념치 않는 듯하던 토머스 대법관이 이런 사실을 신고한 것은 공개 기준이 강화됐기 때문이다. 대법관들은 재산 내역과 함께 투자, 선물, 여행 편의 등도 공개해야 한다. 토머스 대법관은 그동안 “개인적 환대” 차원의 교통편 제공은 예외로 인정된다며 신고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비롯한 대법관들의 윤리 논란이 심각해지는 가운데 상업용 비행기가 아닌 비행편 이용은 신고하도록 규정이 바뀌었다.
토머스 대법관은 규정을 잘못 이해해 그동안 은행 예금 10만달러(약 1억3천만원)를 누락했다고도 밝혔다.
앞서 탐사보도 전문 매체 프로퍼블리카가 폭로한 토머스 대법관의 공짜 여행 등 사례는 연방대법원 역사상 최악의 수준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1991년 사상 두 번째 흑인 연방대법관이 된 그는 억만장자들한테 38차례의 휴가 여행, 34차례의 전용기나 헬리콥터 이용, 스포츠 행사 브이아이피(VIP) 관람 등 갖은 향응을 제공받았다. 휴양지는 카리브해 등지의 특급 시설을 이용하고 공짜로 호화 요트도 탔다.
토머스 대법관을 후하게 접대해온 이들 중 하나인 크로는 그의 조지아주 생가를 매입해주기도 했다. 크로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 연방대법관이 된 토머스 대법관을 기리는 박물관을 지으려고 샀다고 밝혔다. 뉴욕타임스는 토머스 대법관이 소유한 고가의 캠핑버스도 취득 경위가 석연찮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토머스 대법관만큼은 아니지만 다른 대법관들도 학술적 목적을 내건 해외 여행 편의 제공이나 고액 강연료 등으로 논란에 휩싸였다. 새뮤얼 얼리토 대법관은 지난해 듀크대와 리젠트대에서 강의료로 약 3만달러를 받았다고 신고했다.
나머지 대법관들은 올해 재산 공개 신고를 5월에 마쳐 6월에 공개가 이뤄지도록 했다. 그러나 토머스 대법관과 얼리토 대법관은 논란이 커지자 신고 기간 연장을 요구해 이번에 공개가 이뤄졌다.
높은 도덕성이 기대되는 대법관들의 부적절한 행태가 잇따라 폭로돼 비난이 빗발치자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윤리 기준과 점검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민주당은 이를 위한 입법을 주장하는 중이다.
일부 대법관들은 개혁에 저항하고 있다. 얼리토 대법관은 최근 월스트리트 저널 기고에서 의회에는 대법관들의 윤리 문제를 규율할 권한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엘리나 케이건 대법관은 한 행사에서 의회는 법원의 정책을 감독할 권한을 일부 갖고 있다며 얼리토 대법관의 주장을 반박했다.
보수 6명, 진보 3명인 구도에서 윤리 논란은 주로 보수 대법관들에 집중돼 벌어지고 있다. 토머스 대법관과 얼리토 대법관은 극보수 성향으로 분류된다. 이들은 윤리 논란이 불거진 것은 ‘좌파의 음모’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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