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빌리티 혁신, 도시의 미래를 바꾸다
전문가들 “도시 단절과 지역 소멸 해법은 모빌리티 혁신”
(시사저널=이석 기자)
'프랑스의 맨해튼'으로 불리는 라데팡스(La Defense)는 서울 여의도의 절반 크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토탈, 프랑스텔레콤 등 글로벌 50대 기업 중 15개 기업이 현재 이 도시에 둥지를 틀고 있다. 세계 최초로 '보차(步車) 분리' 원칙이 적용된 융·복합 신도시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라데팡스의 지상에는 현재 자동차가 없다. 사람들과 유명 예술작품이 이 공간을 채우고 있다. 자동차·지하철 등 교통 인프라는 지하로 내려갔다.
철도와 도로가 오히려 모빌리티 격차 야기
한국의 현재 상황은 라데팡스와 다르다. 도시 발전의 상징이 돼야 할 철도와 도로가 오히려 도심부의 경계와 단절의 요소가 되고 있다. 경기도 수원시가 대표적이다. 수원시는 현재 경부선 철도를 중심으로 동서로 갈라져 있다. 김도훈 수원시정연구원 연구위원은 "수원을 가로지르는 경부선 철도를 횡단할 수 있는 도로는 1.7km당 1개에 불과하다. 동서 이동에 제약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면서 "그나마 서부는 군공항으로 고도제한이 생기면서 개발이 동부에 집중됐고, 이 동부 지역은 극심한 교통정체가 발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모순적이게도 모빌리티 혁신의 상징인 철도가 지역 내 단절과 모빌리티 격차를 야기한 셈이다.
수원시는 그동안 모빌리티 격차 해소를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해왔다. 김 연구위원은 "수원시는 '수요응답형 버스' 시범운영, 교통 인프라와 자율주행자동차가 정보를 교류할 수 있는 '디지털 도로' 구축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해 왔다"면서 "플랫폼을 기반으로 친환경적이고 효율적으로 이동시간을 압축할 수 있는 교통 체계를 만드는 게 향후 목표"라고 말했다.
시사저널이 8월30일 서울 중구 페럼타워 페럼홀에서 '굿시티포럼 2023'을 주최한 이유이기도 하다. 올해로 6년째를 맞는 포럼의 주제는 '모빌리티 혁명이 불러올 도시의 미래'다. 전영기 시사저널 편집인은 이날 개회식에서 "공간의 개념이 모빌리티 혁신을 통해 완전히 뒤바뀌고 있다. 하늘을 나는 택시, 시속 1000km 이상으로 지하를 달리는 하이퍼튜브, 자율주행차 등이 조만간 현실화될 것"이라면서 "이 모빌리티 기술은 한국 도시의 단절과 지역 소멸, 농촌 인구 감소 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탈출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규철 한국자산신탁 부회장도 "한국은 20세기 중반 이후 본격적인 도시화를 추진해 유례없는 성장을 이뤘지만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다. 교통체증, 환경 문제, 인구의 자연적·사회적 감소로 인한 지방 소멸 위기 등 도시 문제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모빌리티의 발달은 단순한 이동수단으로서의 기능을 넘어선다. 도시의 교통 체계를 혁신하고, 지역 균형발전을 도모하며, 친환경적이고 효율적인 발전을 추진하게 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날 포럼에 참가한 전문가들의 의견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첫 번째 해법은 콤팩트시티다.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아파트는 전체 거주 형태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지금은 전체 가구의 60% 이상이 아파트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수도권 지역의 주택 보급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다. 서울의 경우 특히 문제가 심각하다. 집을 지을 대규모 택지가 사실상 전무한 상황이다.
김세용 경기주택도시공사(GH) 사장(한국도시설계학회장)은 2018년부터 주택난 해소 방안으로 콤팩트시티 조성 사업을 진행해 왔다. 도로와 차고지, 유수지, 물재생센터, 주차장 등 도시 내 이용 빈도가 낮은 토지를 입체적이고 복합적인 도시 공간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이다. 서울 내 빗물펌프장을 그대로 유지한 채 그 위에 주택과 편의시설을 건립한 사업이 대표적이다. 버스차고지를 지하화한 후 주택과 공원을 복합 조성한 경우도 있었다. 김 사장은 "콤팩트시티 조성 사업을 통해 기존 택지 개발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며 "미래세대를 위해서라도 지속 가능한 도시 공간의 개발 경쟁력 확보에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
해외 콤팩트시티 개발 성공사례 주목
정진혁 연세대 교수(대한교통학회장)도 콤팩트시티와 대중교통 시스템 개혁을 통해 도시 팽창의 부작용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서울의 대중교통 분담률이 12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결국 도시의 구조를 바꿔야 한다"면서 "미국과 일본, 프랑스 등에서 콤팩트시티로 전환해 도시 팽창의 부작용을 극복한 사례를 눈여겨봐야 한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미국 버지니아주 알링턴 카운티와 오리건주 포틀랜드, 브라질 쿠리치바, 일본 도야마, 프랑스 파리 등을 꼽았다. 요컨대 미국 알링턴 카운티는 5개 지하철역을 중심으로 고밀 개발을 실시했다. 그 결과 도로교통량이 23% 감소했고, 대중교통 이용률은 35%나 높아졌다. 프랑스 파리의 경우 자동차에서 보행 중심 도시로 탈바꿈했다. 거주지를 중심으로 업무와 교육, 쇼핑, 문화, 의료 등 일상에 필요한 시설과 서비스에 15분 내 접근 가능한 콤팩트시티를 조성하면서 시민들의 호평을 받았다.
고무적인 사실은 국내 지자체들이 최근 경쟁적으로 콤팩트시티 전환을 서두르고 있다는 점이다. 경기도 용인 구성역은 현재 복합환승센터를 건설 중이다. 인접한 경부고속도로 상부에 고속버스나 시외버스가 정차하는 EX-Hub(고속도로 환승시설)와 UAM 버티포트(전용 이착류장)를 건설하는 방안이다. 현실화되면 구성역은 철도와 도로, 하늘을 잇는 모빌리티 허브가 될 전망이다.
GTX 노선이 교차하는 서울역과 청량리역, 삼성역에도 복합환승센터 건설이 추진 중이다. GTX에서 버스, 택시, 개인교통 등으로 빠르게 환승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판매유통이나 문화복지, 주거시설이 복합화되면 효과는 극대화된다. 이날 굿시티포럼의 모더레이터를 맡은 김현수 단국대 교수는 "대도시의 도심이면서 쾌적하고 편리한 환승 거점으로 혁신인력과 혁신기업이 모여드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면서 "모빌리티 허브와 혁신경제 플랫폼이 강력한 도시경제의 추동력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말했다.
지속 가능 건축 플랫폼을 표방하는 에너지엑스의 박성현·홍두화 공동대표는 건물의 에너지 자립을 미래 도시의 핵심으로 꼽기도 했다. 실제로 이 회사가 설계한 제로 에너지 빌딩이 지난 8월 완공됐다. 태양광만으로 에너지 자립률 121%를 달성했다고 한다. 이들은 "신재생에너지를 건물에서 자체 생산하는 것이 바로 에너지 자립이다. 이를 통해 제로 에너지 빌딩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이 제시한 또 다른 해법은 문화와 도시의 결합이다. 이영범 건축공간연구원장은 문화를 통해 도시의 기술혁신에서 파생될 수 있는 노동·소통 분야의 소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그는 "인류의 다양성과 정체성에서 시작되는 차이의 미학이 도시와 결합할 때 문화도시, 나아가 창조도시로 발전한다"면서 "헬싱키, 볼로냐, 더블린 등이 외부(경제적인) 충격에도 큰 영향을 받지 않고 도시 안전성을 유지하는 비결은 고유한 문화 시스템 덕분이다"고 설명했다.
도시의 브랜딩도 중요한 요소다. 잘 만들어진 도시 브랜딩은 '살고 싶은 도시, 방문하고 싶은 도시, 투자하고 싶은 도시'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 도시 브랜딩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정부 주도의 톱다운(Top-down) 방식으로 진행하면서 여전히 브랜드 1.0 시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김나경 고양특례시 도시브랜드기획팀장은 "고양시는 과거 서울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에도 30년간 '베드타운'으로 전략하며 일자리 부족에 시달렸다"면서 "시민과 함께 고양시를 문화 중심 도시로 만들기 위해 많은 사업을 시도했고, 최근 하나둘씩 결실을 맺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산적한 문제도 적지 않다. 이 중에서도 가장 시급한 문제가 바로 도시 집중화에 따른 지역의 인구 소멸 문제다. 최기주 아주대 총장은 "정부의 균형발전 정책은 지금까지 수도권의 주거와 상업, 업무 형태를 모방해 왔고, 결국 지역 고유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결과를 불러왔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런 문제를 해결한 모범적인 사례로 최근 서퍼들의 성지로 떠오른 강원도 양양의 서퍼비치를 지목했다. 최 총장은 "인구소멸지역 대책의 핵심은 '살고 싶은 곳'이 아니라 '가고 싶은 곳'으로 개발하는 것"이라면서 "서퍼비치의 경우 지역 고유의 정체성을 개발해 연간 수십만 명의 MZ세대가 방문하는 국내 대표 관광지로 자리매김했다"고 말했다.
도시 집중화에 따른 지역 소멸 문제에도 관심을
오재학 한국교통연구원장도 "모빌리티 혁신을 통해 인구구조 변화와 지역 소멸 위기를 해결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KTX와 지하철, 광역버스 등 대중교통 서비스는 대부분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농촌 지역은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데만 평균 9.2분 걸린다. 대중교통이 하루 10회 이상 운행되지 않는 곳도 절반 이상이다. 그는 "모빌리티 혁신을 대도시에서 먼저 하려는 접근 자체가 달라져야 한다"면서 "대중교통 인프라를 농촌에 먼저 구축해야 한다. 이 경우 지역을 2시간 이내로 연결하는 메가시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승기 국토교통과학기술진흥원장은 넥서스시티를 지역 소멸 문제의 해법으로 제시했다. 넥서스시티는 기존 도시의 문제를 개선하고 기술혁신에 발맞춘 미래 도시 모델이다. 박 원장은 "인구 감소와 지역 간 불균형, 환경과 식량 위기 심화 등 기존 도시가 가지고 있던 문제가 많았다"면서 "지역과 지역, 도시와 자연, 환경과 인간, 디지털과 물리적 환경 등이 미래 기술을 통해 연결되는 지속 가능한 도시 환경 생태계가 바로 넥서스시티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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