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 주문기의 두 얼굴[살며 생각하며]
가게 자동주문기 앞 어르신
조작법 몰라 허둥대며 탄식
인건비 내세우며 설치 바람
아날로그 세대는 문화 단절
문명 이름으로 편리하다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불편
폭염이 맹위를 떨치던 8월 초, 푹푹 찌는 날씨에 목이 무척 말라 시원한 커피라도 한 잔 마시려고 패스트푸드 판매를 겸한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광화문 사거리여서 그런지 숍 안은 젊은이들로 북적거렸다.
음식이 나오는 곳에 가서 “카라멜 마키아토 한 잔요” 하고 주문했더니, “고객님, 여기선 주문 안 받아요. 출입문 쪽에 있는 자동 주문기(키오스크)를 이용해 주세요”라고 했다. ‘그냥 주문 좀 받아주면 어때서’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시키는 대로 자동 주문기 앞에 늘어선 줄 끝에 섰다. 그런데 내 앞에 선 연세 지긋한 어르신이 자동 주문기 조작법을 몰라 허둥대고 있었다. 몇 번이고 화면이 리셋(Reset)돼 주문이 되지 않자, “이런 답답한…”이라고 짜증 섞인 탄식을 했다. 다행히 내 뒤에 서 있던 40대 남성이 도와 드려 가까스로 주문을 마쳤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그 어르신과 40대 남자 그리고 나는 한자리에 앉게 되었다.
아직 분이 덜 풀리셨는지 어르신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이게 말예요. 젊은 사람들이야 자동 주문기를 잘도 만지겠지만, 나 같은 사람은 저런 기계 앞에 서면 눈앞이 하얘져 아무것도 안 보여요. 앱인지 뭔지 그런 것 잘 못 만지는 나 같은 사람들은 저런 기계한테도 차별을 받아야 하니 참 서럽지요. 그냥 사람이 주문받으면 편할 걸….”
“다 인건비랑 인력난 때문이죠.” 40대가 끼어들었다. “그래도 그렇지. 정 그러면 나 같은 노인을 위해 도우미라도 쓰든지. 큰 병원에 가니까 입력을 대신해 주는 도우미가 있어 편하더구만….” 어르신은 입맛을 쩝 하고 다시며 미간을 찌푸렸다. “업주가 돼 보면 이 꼴 저 꼴 안 보려고 자동기기를 쓸 수밖에 없어요.” 40대는 자신의 일인 양 두 팔을 휘저으며 힘주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사회가 당면한 노인 문제의 첨예한 부분 중의 하나가 바로 자동 주문기이기도 하다. 업주 측이 인건비 절감과 인력난을 해소하기 위해 별수 없이 선택하는 방법은 자동 주문기와 로봇 자동 배달기와 같은 기계들이다. 이 기계들은 골목 상권에서부터 대형 음식점까지 그 영역을 넓혀 가고 있다. 사정이 이러고 보니 디지털 문명에 익숙하지 않은 노년층은 식사 주문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문화 단절을 경험한다. 같은 시대를 살면서도 자동 주문기에서 디지털 세대의 효율성과 아날로그 세대의 문화단절이라는 두 얼굴을 본다.
두 사람의 말을 듣노라니, 지난 4월 말에 내가 겪었던 악몽 같은 사건이 휙 뇌리를 스쳤다. 공연 차 지방에 갔다가 생수를 사기 위해 고속버스 터미널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생수병을 가지고 계산대로 가니 아무도 없었다. 그제야 무인 편의점임을 알았다. 카운터에 있는 가격 리더기로 물품 가격은 가까스로 입력했지만, 카드를 넣어도 결제가 되지 않는 것 아닌가. 카드를 아이시칩으로 꽂아도 되지 않고, 마그네틱으로 긁어도 영 결제가 되지 않았다. 막차 시간이 5분밖에 남지 않아 별수 없이 생수를 포기하고 나오려는데, 어럽쇼? 이번엔 출입문이 잠겨 열리지 않았다. 정말 큰일이었다.
다음 날 아침 생방송에 나가려면 이 막차를 타지 않으면 안 되는데, 꼼짝없이 편의점에 갇혀 버린 것이었다. 갑자기 멘붕이 되어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현대의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그저 편하다는 이름으로, 경제적이라는 이름으로, 자동이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사각지대에 감금되어 불안에 떠는 경우도 있음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누군가의 편리는 또 다른 누군가의 불편이 될 수도 있음을 몸으로 겪는다.
2023년 이 시대를 사는 세대, 특히 그중에서도 1955∼1963년 사이에 태어난 세칭 베이비붐 세대는, 아날로그 시대와 디지털 시대의 양쪽에 걸쳐 있다. 6·25전쟁 이후 먹을 것, 입을 것, 잘 곳도 없는 3무(無) 시대를 살면서, 잿더미 속에서 피땀으로 일으켜 세운 대한민국이다. 어떤 시인이 말했듯이 이 시기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 세대는 이미자 노래 한 자락에 굶주림과 헐벗음을 달래며 쟁기질을 하고 호미질을 했다.
“부르즈 할리파(Burj Khalifa)라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을 내 손으로 지어 올렸지.” 그 어르신도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에서 10년 가까이 일했단다. “우와∼ 진짜요? 톰 크루즈가 나오는 영화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을 찍었다는 그 건물 맞죠?” 나는 놀라워하며 물었다. “그 건물을 우리나라 건설회사가 지었다면서요?” 40대도 맞장구쳤다.
그 어르신처럼 아날로그 세대가 나라 안팎에서 피땀을 쏟아 가난했던 이 나라를 도약시킬 웅대한 토대를 만들었다면, 디지털 세대는 세계 10대 강국의 기술력과 세계를 한국화하는 한류 문화 콘텐츠를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의 기적을 만들었던 아날로그 세대들은 나날이 문화 단절의 절벽으로 밀려나고 있다. 달리 찾을 것도 없이 이 어르신이 바로 그 표본이다.
잠시 후, 40대가 말했다. “제가 식당을 운영했었는데요. 종업원을 쓰면 4대 보험 들어 줘야죠, 그나마 며칠 일하다가 말도 없이 나가 버리죠, 최저임금은 올라가죠, 그러니 자동기기를 안 쓸 수가 없죠. 게다가 가게 세(貰) 나가죠, 대출금 갚아야죠, 결국 코로나19 시기를 지나며 투자한 돈 다 까먹고, 이제는 거리에 나앉았어요.”
40대는 다시 한숨을 푹 쉬더니 “이제 실업급여 신청하러 가려고요”라며 서류 봉투를 보여주었다. 폐업사실증명원, 부가가치세 과세표준증명원이라는 서류 위에 굵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가벼운 목례를 하더니 문을 열고 나갔다.
그 문틈 사이로 한 무리 시위대의 확성기 소리가 귀청을 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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