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함운경 "난 남파간첩 만나 커피 마시고도 신고 안했다"(종합)

윤근영 2023. 9. 1.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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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6 정치인들, 전두환보다 못하다는 소리 들을 수 있다"
"1986년부터 주체사상에 경도된 학생들 늘어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는 가능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불행에 빠트린다"
"한국 정통성 부정하는 역사관ㆍ세계관이 현재 주류로 부상"

[※ 편집자 주= 함운경 민주화운동동지회 회장의 인터뷰 기사는 두차례로 나눠 송고합니다. 이번이 첫 번째 인터뷰 기사이며 두 번째 기사는 다음 주 중에 송고할 예정입니다.]

1985년 5월 미문화원 점거 농성 중 성명서 발표하는 함운경

(서울=연합뉴스) 윤근영 선임기자= 함운경(59)은 1985년 5월 미문화원 점거 농성의 주모자였다.

그는 남한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게 목표였으나 사회생활을 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그는 사회주의 건설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그쪽으로 가서도 안 된다고 했다. 모든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난 23일 전라북도 군산시 '네모선장' 횟집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이 횟집의 사장이다.

함운경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586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원래 의도와 상관없이 전두환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며 "무능하고,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고통에 빠트리니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 사회에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세계관과 역사관이 주류로 인식되고 있다"면서 "이런 것을 바로잡기 위해 지난 8월15일 민주화운동동지회를 결성해 활동을 시작했다"고 했다.

1982년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한 그는 학생운동에 투신했고, 4학년 때인 1985년 5월에 서울 을지로 미문화원 점거 농성의 주모자로 투옥됐다. 교도소에서 나온 이후 학원 강사, 조경사업자를 거쳐 횟집 사장이 됐다. 그는 국회의원과 지자체장 선거에 여러 차례 출마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함운경 [촬영 이다빈]

-- 고향은 어디인가.

▲ 1964년 전라북도 군산에서 3녀 1남의 둘째로 태어났다. 그곳에서 고교 시절까지 살았다.

-- 부모님은 어떤 분인가.

▲ 부모님 두 분은 공무원이셨다.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공무원직을 그만두고 여러 가지 사업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셨다. 아버지는 빈 병을 수거해 파는 사업을 했고, 목포에 내려가 해태 김 양식업을 하기도 했다. 내가 미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으로 구속되자 하던 일을 접고 서울로 올라오셨다. 어머니는 보건직 공무원이었다.

-- 부모님이 공무원이었다면 가난한 집은 아니었을 듯한데.

▲ 지금은 공무원이라는 직업이 안정적이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공무원은 박봉이었고, 그것은 부패의 요인이 됐다. 1980년대 들어 공무원의 월급이 올라가기 시작하면서 공무원의 부패도 줄었다.

-- 공무원 신분이었던 어머니는 아들이 반정부 투쟁으로 구속된 것 때문에 곤란한 일을 겪지 않았나.

▲ 어머니는 공무원직에서 물러나라는 압박을 받았다. 어머니는 "아들은 아들 삶을 살고, 나는 내 삶을 사는데, 내가 왜 그만두느냐"고 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군산 모습

-- 부모님의 교육관은 어떠했나.

▲ 부모님은 어릴 때부터 나에게 간섭하는 일이 없었다. 어릴 적에 괘종시계가 궁금해서 분해한 적이 있는데, 어머니는 꾸중하지 않으셨다.

-- 공부를 잘했으니 간섭을 안 하신 것 아닌가.

▲ 그건 잘 모르겠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공부를 잘하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

-- 갑자기 왜 공부를 잘하게 됐나.

▲ 나는 7세에 초등학교에 들어갔기에 처음에는 적응을 잘 못 한 것 같다. 3학년 때부터 학교에 적응되니 성적이 좋아졌다.

-- 왜 학교에 일찍 들어갔나.

▲ 나는 바로 아래 여동생과 이란성 쌍둥이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나를 1년 먼저 학교에 보냈다. 오빠와 동생 관계를 분명히 하셨던 것 같다.

1987년 11월 학생들의 가두 진출을 막기 위해 서울대 정문에 도열한 전경들 [연합뉴스 자료사진]

-- 본인은 군산제일고를 졸업했는데, 어떤 학교인가.

▲ 전북에서는 전주고가 명문이었는데, 전주 시내 고등학교들이 평준화되는 바람에 군산제일고가 새 명문으로 부상했다. 군산에 합판과 제지 공장으로 자수성가한 고판남 사장님이 있었다. 그분은 학교를 키우는 게 꿈이었다. 본인이 못 배운 데 대한 한이 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도 못 나왔거나, 초등학교만 졸업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분은 군산의 영명학원을 인수해 문교부(지금의 교육부) 관료였던 김재규라는 분을 교장으로 모시고는 학교 운영에 관한 모든 것을 맡겼다.

-- 본인은 장학금으로 학교에 다녔다고 하던데.

▲ 그 교장 선생님은 군산 시내뿐 아니라 전북지역 시골 중학교까지 찾아다니며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을 스카우트했다. 내 친구 중에는 중학교 시절에 전깃불이 안 들어와 호롱불 아래에서 공부했던 사람도 있다. 학교 측은 성적이 좋은 학생에게 고등학교 등록금과 기숙사비를 면제해주고, 대학교 4년간 등록금도 준다고 약속했다. 나도 그 수혜자였다. 학교 측의 이런 정책은 군산 시내 고등학교들도 평준화되는 바람에 오래가지 못했다. 고 이사장은 사업이 어려워졌는데도 사비를 들여 대학 등록금 지급 약속을 끝까지 지켰다.

-- 고교 시절은 어떻게 지냈나.

▲ 교장 선생님은 학생뿐 아니라 교사도 스카우트했다. 다양한 성향의 선생님들이 우리 학교로 오셨는데, 학생들에게는 축복이었다. 이광웅 국어 선생님이 계셨다. 그분은 어릴 때부터 그 지역의 문재(文才. 문학적 재능이 있는 인재)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입시 교육에 집중하는 교사는 아니었다. 나는 그 선생님과 대화를 많이 나눴다. 그분은 러시아 혁명사 같은 책도 읽어보라고 주셨다.

-- 고교 시절을 평탄하게 보냈나.

▲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한달가량 학교를 나가지 않은 적이 있었다. 틀에 박힌 생활이 싫어서 서울 누나 집에서 빈둥빈둥 시간을 보냈다. 나는 학교에 가지 않으면 뭔가 할 일이 생길 줄 알았는데, 특별한 것이 없었다. 교장 선생님이 다시 학교에 나오라고 해서 못 이기는 척하고 다시 학교에 갔다.

2008년 11월25일 광주고등법원에서 무죄선고를 받고 만세를 외치는 오송회 사건 피해자들 [연합뉴스 자료사진]

-- 고교 시절 기억에 남는 것은.

▲ 군산제일고에 오송회 사건이 있었다. 이광웅 선생님을 비롯한 5명의 선생님이 1982년 4월19일 학교 뒷산에 올라가 소나무 아래에서 4.19 기념식을 갖고 반정부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용공 분자로 몰린 사건이다. 이분들은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법정 구속돼 징역을 살고 나왔다. 조사과정에서 고문도 당했다고 한다.

-- 본인이 고교 시절에 발생했나.

▲ 사건이 된 것은 내가 대학교에 들어간 이후였다. 이 사건은 나와도 관계가 있다. 고교 시절 이광웅 선생님이 이사한다고 해서 도와준 일이 있다. 그때 나는 장롱 아래에서 필사본 시집을 발견했다. 월북 작가 오장환의 '병든 서울'이라는 시집을 베껴 쓴 시집이었다. 나는 이 필사본을 선생님께 드렸는데, 친구들이 궁금해서 그 시집을 갖고 갔다가 시내버스에 두고 내렸다. 버스 안내양이 이 시집을 발견하고는 내용이 이상했던지 당국에 신고했다. 당국은 이때부터 우리 학교를 주시하던 중 오송회 사건을 만들었다. 버스에 시집을 놓고 내린 친구 중에는 현재 민주당 국회의원인 김의겸도 들어있다.

1988년 8월15일 연세대에서 시위를 벌이 전대협 학생들 [연합뉴스 자료사진]

-- 대학교에 가자마자 학생운동을 시작했나.

▲ 나는 갈등했다. 아인슈타인과 같은 물리학자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지만, 고등학교 때처럼 틀에 박힌 대학 생활이 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했다. 나의 고민을 이광웅 선생님께 이야기했더니 대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조언해줬다. 입학한 뒤 자연대 게시판에 '과학세대'라는 학내 잡지의 편집실 회원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붙은 것을 봤다. 그 편집실에 찾아갔더니 선배들은 내가 감당이 안 된다면서 한 서클을 소개해줬다. 자연대 지하서클이었다.

-- 고교 시절에 이미 대학 서클에 관심이 있었던 것 아닌가.

▲ 1981년도 경향신문에 시리즈물이 실렸는데, 좌경화된 학생들이 읽는 책을 소개했다. 자본주의 이행과 관련한 논쟁, 자본주의 발달사, 경제학, 서양 경제사 등이 있었다. 나는 대학에 가면 그런 책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그때 했다.

평양 주체사상탑과 앞을 지나가는 평양시민들 [연합뉴스 자료사진]

-- 대학 지하 서클에서 무슨 공부를 했나.

▲ 처음에는 '해방전후사의 인식' 같은 책을 읽었고 1학년 말쯤에는 마르크스주의, 소외론, 경제학, 경제사 등을 읽었다. 관련 철학책도 봤다.

-- 사회주의 공부를 한 것인가.

▲ 그렇다.

-- 주체사상 공부는 하지 않았나.

▲ 나는 대학교에 다닐 때 주체사상을 공부하지 않았다. 1985년 미문화원 점거사건으로 원주 교도에서 감옥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1986년 말이 되니 주체사상 이야기를 하는 학생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1987년에는 그런 학생들이 많아졌다. 그들은 나에게 "형은 출소하면 교육 대상"이라고 했다. 주체사상을 모르니 공부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 주체사상은 논리 자체가 허술한 듯한데, 왜 그 많은 학생이 경도됐을까.

▲ 교도소에서 나온 뒤 한 후배가 건넨 주체사상 문건을 읽어본 일이 있다. 논리 자체가 단순했고, 말이 안 된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이론이 구비돼 있었다. 마르크스ㆍ레닌주의는 복잡하다. 철학적인 것도 있고, 헤겔도 거론된다. 주체사상은 그런 복잡함이 없기에 외우면 되니 전파하기도 쉽다. 민족주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도 파급력이 커진 이유 중 하나로 본다. 복잡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주체사상에 매력을 느끼기 어렵다.

1985년 5월25일 미문화원 점거 농성 중인 대학생들 [연합뉴스 자료사진]

-- 미문화원은 왜 점거했나.

▲ 광주의 5월을 크게 부각할 수 있는 선도적 전술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전년도에 민정당사 점거 농성으로 관심을 끈 적이 있었으니 이번에도 점거 농성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주한 미국 대사관과 대사관저도 점거 대상으로 검토됐지만 진입이 어렵고 금방 끌려 나올 가능성이 있었다. 시간과 공간의 확보가 어렵다는 판단이 들었던 것이다. 결국 가장 무난한 미 문화원으로 정해졌다. 비교적 소수의 인원이 자유롭게 들어가 점거할 수 있는 곳이었다.

-- 미문화원을 점거하고는 미군 철수를 주장했나.

▲ 당시 미군 철수를 주장하지 않았다. '우리는 왜 미문화원에 들어왔는가?'라는 글을 내가 썼다. 첫째로 광주사태 당시 공수부대와 20사단 이동에 대해 미국이 사전 승인한 것에 책임을 묻고자 한다고 했다. 둘째로 미국은 전두환 정권을 지원하지 말라고 했다. 셋째로 미국 국민은 미국 정부가 잘못된 행위를 못 하게 하라고 했다.

-- 지금에 와서 보면 그런 주장은 타당한가.

▲ 한미연합사는 한국 공수부대와 20사단에 대한 통제권이 없었다. 공수부대에 대해 미군 통제권이 없다는 것은 점거 당시 미국 측이 우리한테 설명한 내용이다. 공수부대가 광주로 이동한 것이 미군과 상관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우리는 곤란했다. 그래서 우리는 20사단을 물고 늘어졌다. 박준병이 사단장으로 있었던 20사단은 미군 승인하에 광주에 투입된 것이 아니냐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었다.

-- 20사단을 물고 늘어진 것도 오류였나.

▲ 20사단이 한미 연합사에 들어가 있지 않다는 것은 당시 미국 측도 제대로 몰랐기에 점거 중인 우리한테 제대로 해명하지 못했다. 미국 측은 "20사단이 훈련이 잘돼 있고,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승인했다"고 했다. 나중에 나는 미군이 20사단에 대한 통제 권한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미문화원 점거 농성하다 연행되는 함운경 [연합뉴스 자료사진]

-- 미문화원 점거자 73명은 어떻게 선별했나.

▲ 학교별로 정했으니 다른 학교는 어떻게 했는지 모른다. 서울대에는 언더 포스트가 있었다. 배후 조종하는 사람들인데, 이들이 사회대 학생들을 동원했다. 다만, 우리 지하서클에 소속돼 있던 후배 2명이 나에 대한 가드를 맡기로 했다. 일종의 경호원 같은 것인데, 내가 직접 부탁했다는 이유로 그들이 주동자급으로 몰려 징역을 살았다. 지금은 의사와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 미 문화원 점거가 '민주화 운동 관련된 명예 회복 및 보상위원회'로부터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지 않았나.

▲ 나는 그걸로 민주화 운동 보상을 신청하지 않았다. 다른 사안이 있었다. 1984년에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오거리에서 시위한 일이 있었다. 노동3권 보장하라는 것이 슬로건이었다. 이때 학생들이 경찰에 의해 골목에 밀려들어 차곡차곡 쌓이는 일이 발생했다. 마치 이태원 참사 같은 형국이었다. 도주하던 나는 넘어져 있는 여학생을 보고는 되돌아와서 그 학생들 들쳐 업으려 했다. 그 순간 전경이 달려와서는 구둣발로 나의 얼굴을 찼고, 나의 한쪽 눈 망막이 찢어졌다. 의사는 실명될 수 있다면서 망막을 꿰매놓았는데, 나는 그 상태로 40년을 살았다. 그 눈은 지금도 상이 제대로 안 맺혀 잘 보이지 않는다. 내가 보상을 신청한 것은 눈 부상과 관련한 것이었다.

-- 본인은 남파간첩 김동식을 만났다는 이유로 불고지죄 혐의로 기소된 적이 있는데, 그가 북에서 내려온 간첩인 것을 몰랐나.

▲ 1995년에 문익환 목사가 범민련을 해체하고 대중적인 통일 운동체를 만들자고 해서 자주평화통일 민족회의가 발족했다. 그 민족회의 조직부장이 바로 나였다. 어느 날 사무실로 전화가 왔다. 나를 바꿔 달라고 해서 전화를 받았다. 그는 우리 사무실로 찾아왔고, 우리는 다방에서 대화를 나눴다. 그는 자신을 남파된 공작원이라고 했다. 나는 의심쩍었다. 남한의 시민단체 조직부장한테 와서 뭔가 이야기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 안되는 사람이라고 나는 판단했다.

2019년 11월 판문점에서 복송을 거부하며 몸부림치는 탈북어민 [통일부 제공]

-- 1980년대 당시 운동권 학생들이 목표로 했던 것은 사회주의 건설이어서 민주화운동을 했다고 보기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이 있는데.

▲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사상을 갖고 있다고 해서 민주화운동을 하지 않았다고 보기 어렵다. 그런 사상을 가진 상태에서도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것이다. 1987년까지 김영삼ㆍ김대중 중심의 민주화운동에 동참했던 사람 중에는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사민주의자, 미국식 자본주의자 등 여러 분파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 본인은 젊은 시절에 사회주의가 자본주의 대안으로 타당하다고 생각했나.

▲ 세계 사회주의 국가들은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에 망했다. 그때 나는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졌어도 그 이념이 가진 이상이나 꿈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993년, 1994년에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조직국장으로서 북한과 접촉하면서 그런 생각을 완전히 버렸다. 북한은 공산주의도 아니었다. 북한의 대남 사업자들은 혁명가가 아닌 단순한 공무원이었다. 그들은 남쪽에서 혁명운동을 하는 사람을 파트너로 생각하지 않았고, 단순한 이용 대상이라고 봤다. 남쪽의 혁명가들을 함부로 무시하고, 자기들 상관한테 보고할 때 쓰는 용도 정도로 보는 듯했다.

-- 소련, 중국, 북한은 진정한 사회주의가 아니기에 진정한 사회주의를 이루면 이상적 사회가 실현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 아닌가.

▲ 정치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사회주의는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고, 가능하더라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 왜 그렇게 생각하나.

▲ 사회주의는 모든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 인위적으로 평등하게 만들고자 하면 부작용이 발생해 사람들한테 더 큰 피해를 준다. 인간의 욕망을 억제해서 평균적인 삶을 만들고, 그런 제도를 구축하겠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가 집값을 잡겠다고 정책을 잇달아 내놨지만, 결과적으로 집값만 올렸다. 최저 임금을 인상해 근로자들을 도와준다고 했지만, 그들을 노동시장에서 쫓아내는 결과를 초래한다. 원래 의도와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 사례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그런 식이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함운경 [촬영 이다빈]

-- 남한 586 정치인들의 북한에 대한 태도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사람들이 꽤 있는데.

▲ 2002년에 나는 더불어민주당 당원 교육센터 소장을 맡고 있었다. 어떤 북한 인권 행사에 김영환(북한민주화네트워크 고문)과 내가 강연자로 초청됐다. 행사에 가기 전에 그 연설문이 미리 언론에 보도됐는데, 민주당에서는 아침부터 난리가 났다. 어떻게 북한 인권을 이야기하는 행사에 가느냐는 것이었다. 민주당 당직자는 그런 곳에 나갈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결국 그 행사에 참여하지 못했다.

-- 586 정치인들은 인간 사랑이 있었기에 학생운동을 시작했을 것인데 북한 주민이 굶어 죽고, 탄압받는 것은 왜 외면할까.

▲ 나도 잘 이해되지 않는다. 인류사회에는 인권에 대해 보편적 기준이 있다. 우리는 이 기준으로 북한을 봐야 한다. 전두환 정권을 독재정권으로 부른다면 북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북한에 민주화가 필요하면 그렇게 이야기해야 한다. 남과 북에 다른 기준을 적용할 수는 없다.

인천시 강하군 평화 전망대에서 촬영한 북한 황해도 개풍군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 586 정치인들이 북한 시스템을 선호하는 것도 아닌 듯한데.

▲ 남한이 북한 시스템으로 가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것보다는 남한의 현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남한은 친일파들이 세운 나라이고, 분단에 기생해서 사는 나라라고 생각한다. 이러니 대한민국을 긍정하고 나라를 발전시켜야 하겠다는 생각이 없다.

-- 그들이 바라는 통일된 한국은 어떤 모습인가.

▲ 그들이 그에 대해 명확한 비전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대한민국을 긍정하면 자신들이 그동안 생각하고 행동해왔던 것을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진실을 이야기하지 못한다.

-- 과거의 생각이나 행위가 잘못됐으면 늦더라도 바로잡아야 하는 것 아닌가.

▲ 과거의 생각을 정리하고 뛰어넘어야 한다. 쉬운 일은 아니다. 나 같은 사람은 변절자라는 소리를 듣지 않는가. 바른말을 하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고립되니 과거를 반성한다고 말하는 게 쉽지 않다.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부터 새해 업무보고 계획을 보고받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 [연합뉴스 자료사진]

-- 586 정치인들이 전두환보다 안 좋은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고 한 적이 있는데, 무슨 뜻인가.

▲ 586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독재정권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며,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무능하고,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고통에 빠트린다. 그러니 전두환보다 못한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 전두환이 잘한 일이 있나.

▲ 전두환은 총칼로 집권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결과가 나쁜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박정희가 잘못한 것을 잘 정리했다는 점이다. 박정희는 좌파 경제를 추구했다. 국가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방식이었고, 그 결과 1970년대 말에 한국경제가 위기에 빠졌다. 이를 복구한 사람이 전두환이다. 중화학공업 구조조정 등이 그런 과정이다. 자기는 경제를 잘 모르니 김재익 경제수석한테 맡겼다. 586 정치인들이 이보다 못한 결과를 만든다면 전두환보다 못하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2023년 8월15일 민주화운동동지회 발족식 장면 [함운경 제공]

-- 민주화운동동지회를 왜 결성했나.

▲ 우리 사회에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역사관과 세계관이 주류로 인식되고 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집단화돼 있다. 나는 이런 현실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자칫하다가는 이런 인식이 포퓰리즘과 결합해 그리스 같은 나라가 될 수도 있다. 나의 인생 과제는 이런 왜곡을 바로잡는 것이다.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반미투쟁, 반일 민족주의를 그만하라고 말한다. 백해무익하기 때문이다. 우리 공동체가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평소에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이 단체 결성에 참여했다. 단체 발기인이 588명인데, 앞으로 회원이 늘어날 것으로 본다.

--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할 것인가.

▲ 선전홍보 활동을 하고, 역사적인 정리작업도 해야 한다. 증언이나 기록을 모으고, 공개하는 일도 할 것이다. 이념적 무장에도 노력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우리 사회에 공화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keunyou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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