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강대국 대한민국’ 비전 수립할 때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前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2023. 9. 1.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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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의 텔레스코프]

● 군사력보다 자본·기술 더 중요한 시대
● ‘제국’ 건설 사실상 불가능
● 4차 산업혁명發 디지털 플랫폼 윈-윈 → 제로섬
● 韓, 선발 주자 못 되면 美·中 세력권 종속
● 中 경제 속국 안 되려면 강대국 돼야

한국은 자유주의 국제 질서 아래 세계 경제 10위권 국가로 발돋움했다. [Gettyimage]
우리 국민의 마음속엔 '강대국 한국'을 바라는 열망이 자리 잡고 있다. 대다수 국민이 대한민국도 이제는 강대국이 돼 다른 국가에 휘둘리지 않고 잘 살기를 원하는 게 사실이다. 올해 실시한 모든 여론조사에서 한국의 자체 핵무장론을 찬성한다는 응답이 과반, 심지어는 70% 가까이 나오는 것 역시 단순히 북핵에 대응해 한국도 핵 억지력을 갖겠다는 생각을 넘어 '우리도 이제는 핵을 가진 강대국이 되고 싶다'는 열망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정서는 수백 년 이상을 약소국으로 살아온 역사와 힘이 약할 때 주변 강대국에 의해 운명이 좌지우지된 경험을 반영하고 있다.

좌파이든 우파이든 그들이 가지고 있는 통일 비전의 기저에도 강대국이 되고 싶은 열망이 있다. 자칭 '진보 정부'가 내세우는 통일 비전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북한으로 경제영토를 넓히고 대륙으로 진출하자는, 상당히 제국주의적 경향성을 띤다. 북한의 경제정책을 우리가 만들어주고, 북한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고, 북한의 자원을 우리가 확보하고, 북한에 철도와 고속도로를 깔아 대륙으로 진출하는 물류 라인을 확보하자고 말한다. 19세기말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를 건설할 때 하던 말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한류가 세계적 현상이 돼 세계 각지에 우리 노래가 유행하고, 아이돌 스타들이 동남아와 중국을 넘어 유럽·미국·중남미·아프리카 등에서 구름 같은 팬을 몰고 다니는 현상을 보고 언론에서는 '문화영토 확장'이라는 표현을 쓴다. 이러한 제국적 표현에 우리 국민은 거부감을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매우 자랑스러워하는 경향이 있다. 이 모든 것은 바로 제국과 같은 강한 국가, 세계적으로 우뚝 솟은 강대국 조국을 한번 가져보고 싶은 꿈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군사력 → 자본·기술력… 강대국 패러다임 변화

지난 세대가 산업화·민주화·세계화의 숙제를 풀어서 지금 세계가 부러워하는 국가를 만들었듯 현재 한국 주류 세대는 강대국이라는 시대의 비전을 공유하고 반드시 이를 실현해야 한다. 강대국이 되지 못하면 중국이나 미국과 같은 거대 플랫폼 시장의 하위 경제로 전락해 급격히 사회 동력을 상실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 경제권에 편입되면 그들의 하위 경제에 속해 경제적 속국 신세로 전락할 수 있다.

통상 강대국은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 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다른 국가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국가를 의미했다. 일본이 19세기 말~20세기 초 강대국 지위로 올라선 이유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이후 만주와 동남아시아를 점령해 나갈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중국은 일본과 서구 열강의 군사력에 밀려 강대국 지위에서 급속히 밀려났다.

19세기보다 더 이전으로 역사를 되돌려도 강대국은 전쟁으로 결정됐음을 알 수 있다. 거듭된 승전은 제국이라는 거대 국가를 낳았다. 국제정치의 역사는 제국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수많은 제국이 20세기 초반까지 전쟁을 통해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20세기 후반부터 강대국 모습이 바뀐다. 제국은 해체돼 주권을 가진 수많은 민족국가로 쪼개졌다. 세계 최강국 미국이 약소국이라고 평가되던 민족국가 베트남에 오랜 전쟁 끝에 패하고 베트남보다 더 약소국이라고 할 수 있는 북한조차 이기지 못했다. 강대국 소련도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가 수렁 속에서 헤매다가 패퇴하는 등 서구 강대국 모두 중동에서 이렇다 할 승전보를 날리지 못하고 있다.

강대국 클럽 'G7'에 속해 있는 국가 가운데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 군사력을 다 가지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 일본은 헌법에 의해 군사력이 제한돼 있고, 캐나다도 땅은 넓지만 인구와 군사력이 한국보다 낮은 수준이다. 이탈리아도 과연 우리나라보다 더 강대국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을 갖는 사람이 꽤 있지만 여전히 강대국 지위에 올라 있다.

20세기 후반부터 강대국은 바로 '경제력이 강한 국가'를 의미한다. 21세기에 들어서선 이 경제력도 단순히 국내총생산(GDP)이라는 경제규모뿐 아니라 테크놀로지에 의해 좌우된다. 경제력이 국가별로 배분되는 메커니즘도 군사력이나 전쟁이 아니라 '시장'이다.

덩샤오핑에 의해 개혁·개방을 막 시작한 20세기 후반 중국은 강대국이 아니었다. 1990년대 한국을 찾은 중국 지도자들은 한국에서 좀 더 배우고,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저자세를 취했다.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제공하는 세계시장에 올라타서 중국은 급속히 경제력을 키웠고, 순식간에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올라섰다. 단순히 경제 규모만 커진 것이 아니다. 중국의 기술력은 4차 산업혁명 시대 핵심 기술 IT·디지털·배터리·퀀텀 컴퓨팅·퀀텀 통신 등에서 미국을 바짝 추격하고 있다.

이제 중국에 한국은 배울 나라가 아니라 흡수할 나라가 됐다. 미국은 중국으로 가는 주요 기술의 흐름을 끊으려 할 만큼 중국으로부터 위협을 느끼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동안 중국은 다른 강대국과 전쟁을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단지 시장에서 다른 강대국을 이겨왔고, 이를 통해 세계 2위 국가가 됐다. G7 국가는 모두 시장·기술·산업 강대국이다. 현 국제정치에서 강대국이 되는 문법은 전쟁 승리가 아니라 시장·기술 승리다.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불러온 새로운 패러다임

강대국이 되는 문법이 변화한 이유는 자유주의 국제질서라는 새 국제질서의 등장이다.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과거 국제질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동학을 가지고 있다. 첫째, 전쟁에 의한 강대국을 허용하지 않는다. 지난해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지만 이를 통해 러시아가 더 강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전쟁이 러시아의 경제력을 순식간에 업그레이드시킬 수도 없으며 오히려 집단적 경제제재를 받는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국제정치 문법이 바뀐 것을 모르고 형해돼 가는 고대 문법책을 열어본 것이다.
지난해 12월 21일 미국 백악관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어깨에 손을 얹고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미국을 포함한 자유주의 진영은 러시아에 제재를 가하며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 있다. [트위터]
둘째, 자유주의 국제질서에서는 지정학에서 주장하는 요인 '지리'가 강대국이 되는 데 결정적 조건이 아니다. 물론 자원이 풍부하고 넓은 곡창지대에서 풍부한 식량을 확보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지금은 그것보다는 주요 산업에서 얼마나 많은 세계적 기업을 보유하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독보적 기술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부가가치 높은 제품을 세계시장에 팔 수 있고 얼마나 많은 투자를 유치할 수 있는지, 얼마나 많은 우수한 인적자원을 확보하고 얼마나 안정된 시장을 확보하고 있느냐와 같은, 시장에서의 경쟁력이 훨씬 더 중요하다.

석유와 같은 주요 자원이 풍부해 오히려 저주를 받은 국가도, 식량이 풍부하지만 좀처럼 선진국이 못 되는 국가도 많다. 즉 이제 강대국은 지리가 아니라 시장이라는, 인공적 공간에서 결정된다. 한국과 같이 인적자원 이외에는 별로 가진 것 없는 나라도 세계 10위권 경제 강국이 된 반면 비슷한 수준의 인적자원으로 시작한 북한은 이러한 국제질서에서 단절되는 바람에 아직도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주권 민족국가 개념이다. 19세기 이후 전 지구로 퍼져나간 민족주의와 주권의식은 이제 타민족·타국가가 다른 민족이나 국가를 전쟁으로 복속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전쟁은 종결되지 않고 오히려 하나로 연결된 세계시장에 혼란만 가져온다. 득보다 실이 많다. 타국을 새롭게 자국 안으로 복속하는 제국 건설은 불가능에 가깝다.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알 수 있듯 국제사회도 용납하지 않는다.

넷째, 가장 중요한 사항이다. 윈-윈 경제성장을 가능케 하는 세계시장의 존재다. 한국은 이 세계시장이 있었기에 좁은 국토와 적은 인구로 기적과도 같은 경제성장을 할 수 있었고, 동시에 한국의 경제성장이 다른 국가의 경제성장을 방해하지 않았다. 많은 선진국도, 개발도상국도 같이 성장했다. 시장에서 모든 것을 구할 수 있는 자유주의 국제질서에선 굳이 전쟁을 통해 타국의 것을 빼앗을 필요가 없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촘촘하고 복잡한 글로벌 밸류 체인으로 연결돼 있는 것이다.

최근 자유주의 국제질서 문법에 중요한 변화가 생겼다. 4차 산업혁명 기술로 인해 생겨나는 디지털 플랫폼 시장이 기존 시장을 급속도로 교체·진화시키고 있는 현상이다. 한국이 코로나19 팬데믹 위기를 다른 나라에 비해 비교적 잘 넘긴 이유 가운데 하나는 디지털 플랫폼 시장이 잘 발달돼 있었기 때문이다. 굳이 집을 나서지 않아도 휴대폰과 컴퓨터로 구매·배달이 되는 시스템이 주효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서 미국과 중국은 플랫폼을 선점하기 위해 치열히 경쟁하고 있다. [미래의창]

韓 강대국 돼야만 하는 이유

4차 산업혁명은 앞으로 더 많은 경제활동을 디지털 플랫폼 위에 올려놓게 될 터다. 5G 이상 디지털 인프라 위에서 마이크로소프트(MS)나 구글과 같은 빅테크 기업들이 폐쇄적 플랫폼을 만들어 인공지능(AI)을 포함한 중요 제품과 서비스를 공급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플랫폼 네트워크 효과로 인해 이들이 세계시장을 장악하는 결과가 초래된다. 즉 거대 기업이 플랫폼이라는 표준을 선점해 후발 기업에 대한 진입장벽을 세우는 것이다. 현재 이 싸움에서 미국과 중국이 다투고 있는데, 미국은 어떻게든 먼저 AI 기술과 플랫폼 시장을 장악해 중국이 먼저 사다리를 걷어차지 못하도록 견제하고 있다. 윈-윈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제로섬 질서로 변화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만약 중국이 이 경쟁에서 이기거나 '국제질서 다극화'라는 명분으로 세계시장을 몇 개의 세력권으로 나누어 한국을 자국 세력권에 편입하려 한다고 가정해 보자. 한국으로서는 악몽과 같은 시나리오다. 어떤 경우든 한국이 중국의 경제적 속국이 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한국도 플랫폼 시장지배력을 갖는 강대국이 되거나, 국제질서의 한 극을 형성할 수 있는 강대국의 지위를 확보해야 한다. 한국이 강대국이 돼야만 하는 이유다. 과연 우리는 강대국 한국을 만들 수 있을까.

이근
●1963년 출생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미국 위스콘신대 정치학 박사
●前 외교안보연구원(국립외교원) 교수
●前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 한국 위원회 의장
●前 한국국제교류재단(KF) 이사장
●現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저서: '도발하라' '대한민국 넥스트 레벨' 外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前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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