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에 씨앗 심는대서 놀랐다…난 ‘식물의 법칙’을 잊고 있었다
습지보호구역 농장에서 유기농 경작
‘가을 씨앗 뿌리기’에 깜짝 놀라기도
싹 틔우는 조건도 다양…법칙 알아야
올해 2월부터 미국에서 농사를 배우고 있다. 일하고 있는 연구소의 선임연구관님이 토요일마다 농사를 짓는데 올해 함께 해보겠냐고 제안하셔서 따라갔다가 일이 커졌다. 처음에 나는 도시 텃밭쯤으로 생각했다. 지방자치단체에서 땅을 빌려주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서 농사를 지어 다양한 채소를 먹을 수 있다는 설명만 들었기 때문이다. 연구관님의 차를 타고 내린 곳은 뜻밖에도 저그베이 습지보호구역이었다. 메릴랜드주에서 자연환경과 야생생물 연구, 보호를 위해 지정한 곳이다. 그 보호구역 안 강가에 드넓은 농장이 펼쳐져 있었는데 아주 오래전에 유럽인들이 정착했을 땐 담배농장이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자원봉사자들이 완전한 유기농으로 농사를 지어 농산물을 지역민들에게 기부하는 프로그램을 연구관님이 그냥 ‘농사’라고 하신 것이다. 물론 농사에 참여한 자원봉사자도 유기농 농산물을 먹을 수 있지만, 그보다는 기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농사 규모는 컸고 완전한 유기농을 위해 농장을 이끄는 이도 전문가였다. 나는 손바닥만 한 텃밭을 나눠주면 뭘 심을까 설레며 따라갔다가 당황스러웠다. 존경하는 연구관님이 추천하신 건 역시나 이런 일이지 하면서도 거대한 농장 앞에 서니 두려웠다.
식물학자의 위킹홀리데이
그렇게 무턱대고 참여한 농사가 벌써 7개월. 어느새 가을의 시작, 9월이 왔다. 돌이켜보니 설렜던 첫 씨앗 뿌리기, 잡초와의 싸움 후 절뚝거리며 연구소로 출근한 날들, 환상적인 채소 비빔밥의 맛, 무한 반복으로 끝날 것 같지 않던 콩 따기 등 다양한 추억이 떠오른다. 오크라, 토마틸로, 루바브, 그라운드체리 등 익숙하지 않은 외국 채소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것도 신기했다. 가끔 뿌듯함에 세상을 다 가진 듯 사진을 찍어 친구에게 보내면 식물연구를 하러 미국에 갔다더니 농장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하는 거냐며 웃었다.
생각보다 수확이 빨리 이뤄져서 봄에 상추부터 마늘, 감자, 완두콩 등 다달이 다양한 채소를 만날 수 있었고, 수확량은 점점 많아져 8월 말엔 절정에 달했다. 특히 여러 종류의 토마토는 하늘에서 뿌리는 듯 많이 열려 수확을 다 못 할 정도였다. 덕분에 우리는 시간이 갈수록 많은 농산물을 기부할 수 있었다. 기부받은 분들이 환한 얼굴로 채소를 가져가는 모습을 보는 건 정말 뿌듯했다. 마치 우리가 건강을 선물한 것 같았다.
8월 말, 뜨거운 햇빛 아래 또 한 번 노동하는 토요일을 보내고 다음 주는 쉬어야지 생각하며 농장을 떠나려는데 농장의 감독이신 할아버지가 다음 주엔 새로운 씨앗을 심으니 꼭 나오라고 하셨다. 9월이 오면 가을이 시작되는 것이고, 그럼 곧 가을걷이가 있을 테니 올해 노동은 드디어 끝나는 것인가 내심 기대하고 있던 나는 깜짝 놀랐다. 새로운 씨앗이라니, 이건 무슨 말인가? 가을이면 추수하고 쉬는 것이 아니었나?
나는 어릴 때 농촌에서 살았지만 농사와는 무관하게 자라서 사실 지금 미국에서 짓는 게 평생 첫 농사다. 하지만 식물학을 공부했으니 농사를 해보진 않았어도 잘 이해하고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가을에 심는 양파, 배추, 무 등을 떠올릴 수 있고, 야생식물의 생활사를 생각해 봐도 가을에 새로운 씨앗을 심는 건 놀랄 일이 아니다. 순간 난 ‘정말 농사를 책으로만 배웠구나’라며 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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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순환, 간단한 건 없다
가을에 씨앗을 심는 건 사실 식물 입장에서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꽃을 키울 때 봄에 씨앗을 심으라고 흔히 배우지만많은 식물이 가을에 열매를 맺고 씨앗을 땅에 떨어뜨린다. 다르게 말하면 많은 식물이 가을에 씨앗을 심고 있다는 얘기다. 봄에 한꺼번에 새싹이 나니 마치 봄에 씨앗을 뿌린 것 같지만 말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식물들은 야생에서 여러 시기에 씨앗을 땅에 심는다. 초봄에 꽃을 피우고 금방 열매를 맺는 식물도 있고, 여름이나 늦가을에 씨앗을 떨어뜨리는 식물, 열매를 겨울까지 달고 있다가 떨어뜨리는 식물도 있다. 그중 식물이 열매를 많이 맺는 가을엔 특히 많은 씨앗을 심는 셈이다.
그 씨앗들은 가을에 날씨가 아무리 따뜻해도 싹을 내지 않고 잠들어 있다. 이것을 씨앗의 휴면이라고 한다. 휴면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식물마다 다른 방법을 쓴다. 콩알에 계속 물을 뿌리면 콩나물이 되듯 수분은 씨앗을 깨우는 중요한 알람으로 알려져 있다. 높은 온도도 그렇다. 그래서 많은 씨앗이 따뜻한 봄에 깨어난다. 식물의 씨앗을 틔우는 실험에서 수분과 높은 온도는 식물을 깨우는 알람으로 흔히 사용된다. 그러나 씨앗이 휴면에서 깨어나는 건 간단하지 않다. 어떤 식물엔 오히려 건조함과 얼어붙는 차가운 온도가 필요하다. 여러 알람이 복합되거나 지속되는 시간이 얼마인가도 중요하다. 사계절이 뚜렷한 지역에서는 영하의 추운 겨울을 겪어야만 깨어나는 씨앗들이 있다. 온대지역에서 수집한 난초 씨앗을 발아시키는 실험에서 온갖 방법을 써도 깨어나지 않고 4년 동안 미동도 없었을 때 내가 마지막으로 한 것이 냉동실에 씨앗을 넣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 씨앗은 깨어나지 않았다. 인간이 어떤 식물의 경우 잠을 깨우는 방법조차 모른다는 좌절감은 컸다.
그런 실험의 실패를 맛보고 반성을 했는데 9월에 씨앗을 심는다고 놀라다니. 농사도 실험과 다르지 않은데 말이다. 식물을 키울 땐 우리가 식물의 법칙을 알고 맞춰야 한다. 식물의 성장, 식물의 노동이 멈추지 않는다면 농사를 짓는 인간의 노동도 끝낼 수 없다. 자연의 순환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우리가 그 정교한 순환에 뛰어들고 보면 간단한 건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노동이라 생각했던 농사는 이제 내겐 큰 식물 실험이 되었다. 그리고 그 실험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지만 이제 그리 놀랍거나 힘들게 느껴지지 않는다.
글·사진 신혜우 식물분류학자
미국 스미소니언에서 식물을 연구하고 있다. ‘식물학자의 노트’, ‘이웃집 식물상담소’를 쓰고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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