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은 왕일까?[뉴스레터 점선면]
※뉴스레터 점선면 8월30일자(https://stib.ee/zng8)에 게재된 글입니다. 경향신문 대표 뉴스레터 점선면은 이슈와 기사를 엄선해 입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점선면을 구독해 더 많은 뉴스레터를 메일함으로 받아보시려면 여기(https://url.kr/7vzi4n)로 접속해 이메일 주소를 남겨주세요.
2021년 10월1일 저녁, 국민의힘 대선 후보 경선 TV토론회에 나온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손바닥 한가운데 거뭇한 무언가가 보였습니다. ‘王(임금 왕)’이었습니다. 이날은 5차 토론회였는데, 알고 보니 3·4차 토론회에서도 손바닥에 쓴 글씨가 포착됐다고 합니다.
대통령 주변 정가의 이야기를 주워들을 때, ‘지금이 2023년?’ 이렇게 생각할 때가 가끔 있습니다. 어느 대통령의 핵심 측근으로 분류됐던 한 정치인은 대통령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고 합니다. 신하가 머리를 조아리며 왕의 조서를 받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고 용산 국방부 청사에 대통령실을 새로 꾸린다는 말(이른바 ‘용’와대)이 솔솔 퍼질 무렵 나온 어느 기사의 제목은 <‘용의 땅’ 대통령 시대>였습니다. 조선 건국기를 그린 사극의 제목은 <용의 눈물>, 그 드라마에서 왕이 입는 옷은 ‘곤룡포’입니다. 용은 왕의 상징입니다.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사람도, 대통령을 옆에서 돕는 사람도, 대통령 소식을 전하는 사람도 모두 대통령을 왕과 비슷한 무엇으로 생각하는 걸까요? 오늘 점선면은 습관처럼 왕에 빗대는 대통령의 권한 문제를 다룹니다. 문희상 전 국회의장의 책 <대통령>, 정치학자 박상훈의 책 <청와대 정부>를 참고해 준비했습니다.
3개월 만에 사라진 죗값
·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8월15일 광복절을 맞아 2176명을 특별사면·복권*했습니다.
*사면: 법원이 유죄라고 판단하며 선고한 형의 집행을 면제
*복권: 법원이 형을 선고하면서 상실되거나 정지된 자격(취업 등)을 회복
· 이중근 전 부영그룹 회장과 박찬구 금호석유화학그룹 명예회장 등 경제인,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과 김태우 전 강서구청장 등 정치인이 사면·복권됐습니다. 법무부는 “경제 살리기”와 “국가적인 갈등 해소”를 그 이유로 들었어요.
· 특별사면·복권은 헌법과 사면법에 근거를 둔 대통령의 권한이지만, 이를 행사할 때마다 으레 논란이 뒤따릅니다. 2022년 문재인 당시 대통령은 새해를 맞아 박근혜 전 대통령을 사면·복권한 게 대표적 사례예요.
· 이번에는 김태우 전 구청장이 대법원 확정 판결 3개월 만에 사면·복권된 데다, 그가 당시 판결로 구청장직을 잃으면서 오는 10월 열리게 된 보궐선거 출마를 선언해 논란이 커지고 있어요. 점선면 독자님 중에도 “판결문의 잉크도 마르기 전에 사면·복권하는 것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라고 해도 자유민주 체제에 역행한다”(shiny님)고 비판한 분이 계셨습니다.
· 특히, 윤 대통령이 검사 시절 수사하거나 수사를 지휘한 사건 연루자들이 현 정부 출범 이후 줄줄이 사면·복권됐습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명박 전 대통령, 최경환 전 기획재정부 장관,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우병우 전 민정수석비서관 등입니다.
· 윤 대통령은 이전 대통령들에 비해 특별사면·복권 권한을 자주 행사하고 있어요. 임기를 통틀어 박 전 대통령은 3회, 문 전 대통령은 5회였는데, 윤 대통령은 취임 1년 3개월 만에 이미 3회가 됐습니다.
· 대통령이 특별사면권을 사유화한다는 인식을 주면서 존폐가 거론되기도 해요. ‘제왕적’이라고 불리는 대통령 권한의 일면을 보여줍니다.
· 오늘 점선면은 인사권·거부권 등 최근 대통령의 권한을 두고 논쟁이 된 몇몇 사례를 들춰보면서, 우리 대통령제의 요모조모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전임 대통령에 비해 특별사면권을 자주 사용하면서 대통령의 권한이 논란이 되고 있어요.
1. 대통령이 쥔 밥그릇
최근 이동관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임명을 앞두고 반발이 거셌어요.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있듯, 대통령에 관한 뉴스의 상당수는 인사 문제를 두고 터져 나옵니다. 그만큼 대통령이 좌우하는 인사 범위가 넓기 때문이에요.
문희상 전 국회의장은 저서 <대통령>(2017)에서 “(우리 대통령의) 막강한 힘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라는 물음을 던지며, 그 근원으로 ‘직접 투표로 선출됐다는 민주적 정당성’ 이외에도 ‘인사에 대한 권한’, 즉 인사권을 꼽았어요.
문 전 의장에 따르면, 2017년 기준 대통령에게 직접 임명장을 받는 인사는 7000여명에 달합니다. 장관급 27명과 차관급 90명 등 고위 공직자 117명에 3급 이상 정부부처 고위 공무원 1500여명, 검사 이상 검찰 직원과 경정 이상 경찰 직원, 참사관 이상 외무 공무원, 국립대 총장 등 교육 공무원을 모두 합한 숫자예요.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17개 공기업 사장·감사, 29개 준정부 기관과 18개 기타 공공기관의 기관장·위원의 인사권도 대통령에게 있어요. 여기에 대통령이 직접 임명장을 주지 않더라도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자리까지 통틀어 봐야 한다는 게 문 전 의장의 설명입니다.
‘인사권’은 임명뿐만 아니라 휴직, 전직, 징계, 파면 처분을 내릴 권한도 뜻합니다. 대통령의 입김이 미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그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도리가 없는데, 그 범위가 최소 ‘7000+α명’인 거예요.
구독자 구피님은 “각 기관에 대통령의 손길이 닿고 좌지우지하는 구조적 문제가 대통령의 권한을 더 강력하게 만드는 듯합니다”라고 하셨어요. 실제로 이 정도 인사권이면 대통령의 직접 영향권을 벗어난 기관은 없다고 할 만합니다.
혹시 노태강 전 문화체육관광부 2차관을 기억하시나요? 30여년 문체부 공직생활을 차관으로 마무리했지만, 그 과정에서는 한때 명예퇴직을 ‘당하는’ 수모도 겪었던 사람입니다. 좌천의 배경에는 당시 대통령의 “참 나쁜 사람이라던데”라는 전언 한 마디가 작용했다는 증언이 있어요. 대통령 인사권의 무시무시함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2. 1명에게 힘이 집중될 때
최근에는 대통령의 권한을 넘어서 인사권을 휘두르는 정황도 볼 수 있었어요. 헌법은 대법원장이 대법관 후보를 제청(결정해 달라고 건의)하면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규정하는데, 대통령실이 특정 후보에 대한 거부권을 검토하며 아예 제청 단계에 개입했다는 논란이 일었습니다. ‘대법관 거부권 검토’ 사건을 두고 헌법이 규정한 삼권분립 취지를 훼손했다는 지적이 나왔어요.
인사권력이 집중된 대통령 주변에서만 ‘인재풀’이 나오는 한계도 뚜렷합니다. 자연히 대통령과의 친분이 두텁거나 정치적 교류가 잦았던 사람들이 능력·도덕성 검증과 상관없이 요직에 발탁되는 문제가 반복되곤 해요.
국회는 인사청문회 실시 후 그 내용과 적격·부적격 의견을 담은 인사청문보고서를 채택하는데, 윤 대통령 취임 후 지금까지 이 보고서 채택 과정 없이 임명한 고위직이 이미 16명(이동관 방송통신위원장 포함)에 이릅니다. 이들의 자질 문제뿐만 아니라, 인사권이 대통령에게 집중되면서 인사 문제가 첨예한 정쟁 대상이 된 현실도 함께 볼 필요가 있어요. 한 익명의 독자님은 “최근 적절치 않은 인사들을 국회 청문회와 관계없이 그냥 임명하는 일이 잦은 걸 보면 (대통령의) 권한이 너무 강한 것 같아요”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참여정부 당시 만든 인사검증 시스템(청와대 인사위원회 등)의 부활이나 미국의 ‘플럼 북(Plum Book)*’ 등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사 추천·발탁이나 검증 제도를 체계적으로 갖추자는 거예요. 하지만 이 역시 대통령 1명이 지닌 인사권력의 크기를 줄이는 방안은 될 수 없다는 점에서 한계가 분명합니다.
*플럼 북: 대통령이 임면권을 가진 연방정부 9000여개 직책, 근무지, 재직자 성명, 임명 방식, 급여, 임기 등 정보를 담은 책자. 표지가 자두(plum)색이어서 붙은 이름이에요.
3. 우리의 수퍼하이퍼 대통령
인사권은 대통령의 여러 권한 중 하나일 뿐입니다. 우리 대통령제가 대통령에게 부여한 권한을 들어, 과연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반영한 삼권분립 체제(행정부·입법부·사법부)가 맞는지 의문을 표하기도 해요.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한국 대통령은 대통령제의 원형으로 불리는 미국 대통령에게는 없거나 그가 크게 제약을 받는 개헌안 발의권·법률안 제출권·예산권·인사권·감사권을 전부 갖고 있다”며 “초과 대통령(super-president), 과대 대통령(hyper-president), 제왕적 대통령”이라고 주장합니다.
제왕적 대통령, 한 번쯤 들어봤을 이 말이 드디어 나왔습니다.
역사학자 아서 슐레진저가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 시기에 한껏 강화된 대통령 권한과 대통령 주변 조직 규모를 비판적으로 진단하며 쓴 책 <제왕적 대통령(Imperial Presidency)>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대통령제를 택하는 나라에서는 자국의 대통령을 비판할 때 이 말을 종종 사용합니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최근 연금개혁을 추진하면서 제왕적 대통령이라고 비판받았어요.
한국에서도 이 용어는 대통령을 비판하는 무기로 인기가 높습니다. 올해 초 윤석열 대통령이 양곡관리법과 간호법에 잇따라 거부권을 행사했을 때 야당에서는 “제왕적 대통령이 되어버린 윤 대통령”이라는 지탄이 나왔어요.
대통령이 7000개 넘는 자리의 인사권 등 ‘제왕적 권력’을 휘두르면서, 행정·입법·사법 등 삼권분립 체제를 위협하기도 합니다.
1. 제왕적 권력의 아이러니
하지만 거부권 사태는 한편으로 제왕적 대통령의 ‘아이러니’, 나아가 우리 권력 구조의 ‘비극’을 생각하게 합니다.
여야는 쟁점 법안을 두고 국회에서 합의안을 도출하지 못하고,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것을 예상하거나 행사해 달라고 요청하며 극한 대립을 일삼습니다. 대통령은 ‘여야가 계속 물고 뜯고 싸우는 모습을 보일수록 청와대의 지지율은 반사적으로 올라간다는 정치적 셈법’(문희상 전 의장)을 당장은 즐길지 모르지만, 야당이 밀어붙인 법안을 거부하는 ‘네거티브(negative) 정치’만 할 수 있을 뿐이에요. 여야와 협력해 입법으로 자신의 국정과제를 실현하는 ‘포지티브(positive) 정치’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통령은 어김없이 ‘시행령 통치’라는 유혹에 이끌립니다. 윤석열 정부는 시민단체를 겨냥한 보조금 제도 개편, 전기요금에 포함된 KBS 수신료 분리징수, 검찰 수사 범위 확대와 경찰국 설치 등 굵직한 제도 변경을 국회 입법을 통하지 않고, 시행령 개정으로 잇따라 해결했어요. 문재인 정부 역시 “시행령주의에 의존했다”라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시행령 통치는 야당을 ‘반대를 위한 반대’만 하는 존재로 인식한 결과이며, 삼권분립 취지를 무색하게 만듭니다. 일시적으로는 정권의 목표를 달성한 것으로 보일지 몰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5년짜리 단임정부’의 시각이에요. 검찰 수사권처럼 현재 정부에서 시행령을 고쳐 뒤집은 정책은 다른 정부에서 얼마든지 또 시행령을 고쳐 뒤집을 수 있으니까요. 결코 영속적일 수 없는 통치 방식입니다.
다양한 사회 구성원을 대변하는 의회를 거치지 않기에 비민주적인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그 와중에 의회는 제 역할을 잃었습니다. 여야는 더 이상 협상 테이블에 끈덕지게 마주 앉아 이견을 조율하고 합의에 이르는 데 에너지를 쏟지 않아요. 여당은 “청와대의 하위 파트너 역할”(정치학자 박상훈)에, 야당은 여당이 아닌 대통령을 상대하는 데 골몰합니다.
7000+α명의 인사권을 쥔 ‘제왕적’ 대통령이 자신의 국정 목표를 실현할 때는 ‘꼼수’로 도피하는 아이러니, 이렇게 꼼수로 쌓아 올린 국정 성과는 정권에 따라 허망하게 사라질 수 있는 비극이 바로 한국 대통령제의 현실이에요.
2. 정말 헌법이 문제일까?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 문제를 논할 때는 개헌이 대안으로 제시되곤 합니다. 2016년 말 국정농단 정국 직후 치른 19대 대선에서는 개헌이 화두가 됐어요. 이 선거에서 승리해 집권한 문재인 정부는 2018년 3월 실제로 개헌안을 발의했습니다. 당시 개헌안은 대통령에 대한 ‘국가원수’ 칭호 삭제, 특별사면권 일부 제한, 헌법재판관 등 인사권 독립 등을 담아 대통령 권한 축소에 역점을 둔 것으로 평가받았습니다.
하지만 헌법이 규정한 한국의 대통령제는 이미 분권적 요소를 갖췄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정치학자 박상훈은 <청와대 정부>(2018)에서 “우리 헌법은 순수한 대통령제도 아니고 순수한 의회중심제도 아닌 혼합형 정부 형태를 뒷받침하고 있다”며 부통령은 없고 국무총리가 있는 점, 총리를 의회 동의를 받아 임명하는 점 등을 듭니다. 헌법 86~89조는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의 임명, 이들이 참여하는 국무회의의 권한을 세세히 규정하고 있어요.
제86조 ①국무총리는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
제87조 ①국무위원은 국무총리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
제88조 ①국무회의는 정부의 권한에 속하는 중요한 정책을 심의한다.
제89조 다음 사항은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
1. 국정의 기본계획과 정부의 일반정책
2. 선전·강화 기타 중요한 대외정책
3. 헌법개정안·국민투표안·조약안·법률안 및 대통령령안
4. 예산안·결산·국유재산처분의 기본계획·국가의 부담이 될 계약 기타 재정에 관한 중요사항
5. 대통령의 긴급명령·긴급재정경제처분 및 명령 또는 계엄과 그 해제
6. 군사에 관한 중요사항
7. 국회의 임시회 집회의 요구
8. 영전수여
9. 사면·감형과 복권
10. 행정각부간의 권한의 획정
11. 정부 안의 권한의 위임 또는 배정에 관한 기본계획
12. 국정처리상황의 평가·분석
13. 행정각부의 중요한 정책의 수립과 조정
14. 정당해산의 제소
15. 정부에 제출 또는 회부된 정부의 정책에 관계되는 청원의 심사
16. 검찰총장·합동참모의장·각군참모총장·국립대학교총장·대사 기타 법률이 정한 공무원과 국영기업체관리자의 임명
17. 기타 대통령·국무총리 또는 국무위원이 제출한 사항
국회가 국무총리에게 자꾸 ‘책임총리’가 되라고 주문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현 헌법에 근거해도 국무총리는 각 부처 장관과 일상적인 국정 운영을 맡아 공동 책임을 질 수 있다고 해석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현실의 국무총리는 국무위원은커녕 직속 수하조차도 뜻대로 천거하지 못할 정도로 실질적인 권한이 없어, ‘식물 총리’라는 비아냥을 듣습니다. 헌법 86조 2항은 ‘국무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하며, 행정에 관하여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각부를 통할한다’고 규정하는데, 실제 국무총리는 대통령의 명에 종속돼 행정각부를 통할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요. 현존 권력 분점 제도도 제대로 구현되지 않는 겁니다. 쏠맨 독자님의 말씀대로 “권한 자체의 문제보다는 운영의 문제”가 있는 셈입니다.
3. 2017년 대선의 교훈
일각에선 무조건적 개헌이 오히려 위험할 것이라고 염려합니다. “거대 정당들이 권력을 독과점하는 구조를 바꾸지 않은 채 개헌이 이뤄지면 영국의 마거릿 대처와 같은 제왕적 총리가 탄생할 것”이라는 지적이 있어요.
공고한 양당 구조 때문입니다. 국민의힘 혹은 더불어민주당만 존재하는 체제에서는 갈등이 극단적으로 양극화하며, 서로를 배척하는 접근법만 횡행해요.
연동형 비례대표제(정당 득표율에 따라 국회 의석을 배분하는 선거제) 등을 도입해 다당제를 구축하면 다를까요? 박상훈은 “(다당 구도에서는) 상대 경쟁자를 극단적으로 배제하는 접근보다는 다수 연합을 고려하는 문제가 더 중요해(진다)”며 2017년 대선 구도를 상기합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 국민의당, 바른정당, 정의당 등 5개 정당이 경합하다 보니, 모든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국회와 협치하겠다”, “정당을 중심으로 책임정치를 실현하겠다”고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는 해석입니다.
의회의 역할을 강화하려면 의회에 대한 신뢰 문제도 풀어야 합니다. 매년 주요 국가기관 신뢰도를 조사한 결과를 보면, 문재인 정부 5년 내내(2017~2021년) 국회의 신뢰도는 대법원, 검찰, 경찰, 국가정보원, 국세청 등 다른 기관 신뢰도보다 낮은 것으로 나타났어요. 지난해 윤석열 정부 출범 후 조사한 결과에서도 국회 신뢰도(3.32)는 대통령실 신뢰도(3.42)보다 낮았습니다. 당시 윤 대통령이 취임 직후 각종 논란으로 국정수행 지지율이 20%대로 떨어졌는데도, 국회는 대통령실보다 더 큰 불신을 받았습니다.
대결적 정치뿐만 아니라, 윤리 문제에 대한 부실한 대처 등 국회의 ‘제 식구 감싸기’ 관행을 되돌아봐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배경이에요. 대통령의 특별사면권 문제에 대해서도 ‘잠재적 수혜자’인 국회가 관련 법 개정에 소극적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4. 한국이 미국보다 큰 것
시행령 통치와 식물 총리는 행정부와 입법부가 제 역할을 못 하는 토양에서 자라납니다. 그럼 대체 나랏일은 누가 챙길까요? 여기에서 대통령 측근 조직, 즉 대통령실(과거 청와대)의 문제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박상훈은 “대통령이 자신을 보좌하는 임의 조직인 청와대에 권력을 집중시켜 정부를 운영하는, 일종의 자의적 통치 체제”라며 이 체제를 ‘청와대 정부’라고 부릅니다. 그에 따르면, 청와대 정부 체제에서는 “의회와 정당, 내각 등 책임 정치의 중심 기관들이 청와대 권력의 하위 파트너”가 됩니다.
청와대 정부의 실상은 인구가 한국(5100만)보다 6~7배 더 많은 미국(3억3100만)의 백악관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청와대 정부>에 따르면, 2018년 1월 기준 한국 대통령 비서실 정원은 443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대통령 비서실에 해당하는 백악관 비서실(White House Office) 직원은 2016년 472명, 2017년 377명이었어요.
대통령 비서실은 숫자만큼이나 그 권한도 큽니다. 박상훈은 “지금 청와대가 대규모의 인적 규모를 유지하면서 장관급 실장과 차관급 수석이 국무총리는 물론 장관을 지휘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특별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며 “청와대 실장과 수석들이 장·차관급의 대우를 받으며 입법·사법·행정의 상위에 서서 지휘하려 한다”고 지적합니다.
이는 문재인 대통령 재임 중 청와대를 향한 비판이지만, 여전히 400명 규모의 비서실을 운영 중인 윤석열 대통령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최근 대통령 측근 인사가 각 정부부처 ‘2인자’인 차관으로 직행하는 ‘차관 정치’에서 오히려 청와대 정부가 외연을 넓히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초대 이승만 정부 당시 대통령 보좌조직은 10명도 채 안 됐다고 합니다. 대통령 비서실이 200명대로 급증한 때는 박정희 정권 시기였어요. 1964년 한 해에만 대통령 비서실 예산이 5배 늘었습니다.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만든 체제가 민주화 이후 지금까지 지속되는 셈입니다. 우리의 대통령제는 이대로 괜찮은 걸까요?
현행 대통령제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개헌을 고려할 수 있지만, 기존 헌법에 나타난 권력 분점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 입법부의 신뢰 회복, 대통령실의 규모·권한 축소 등을 우선 검토할 수도 있습니다.
세 줄 점선면
▶ 최근 윤석열 대통령의 사면권, 거부권, 인사권 등 권한 행사를 두고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 대통령은 제도적으로 막강한 인사권뿐만 아니라 삼권분립 취지에 어긋나는 법률안 제출권 등도 갖는다는 점에서 ‘제왕적 권력’은 현 대통령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 입법부의 낮은 신뢰도, 비대한 대통령 보좌 조직 등 때문에 ‘시행령 통치’와 ‘식물 총리’ 논란이 반복되며, 헌법에 담긴 분권 제도 구현을 막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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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설 기자 nshe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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