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들장애인야학 30년을 지킨 한 사람이 있다 [사람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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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학씨(65)는 1958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
뇌병변 장애인으로 30대까지 거의 집에서만 생활했고 제도권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러니 노들야학은 없어져도 될까? 혹은 '장애인 야학'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세상이 더 좋은 게 아닐까? 김씨는 "제도권 교육을 받지 못한 성인 장애인에게 노들야학이 할 역할이 여전히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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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학씨(65)는 1958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 뇌병변 장애인으로 30대까지 거의 집에서만 생활했고 제도권 교육을 받지 못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신문에 난 구인공고에 ‘정립전자’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1991년 8월 서울 광진구에 있는 장애인 근로사업장 정립전자에 입사했다.
1993년 8월8일, 정립회관(사회복지법인 한국소아마비협회에서 개관한 한국 최초의 장애인 복지관) 신관 탁구장에서 ‘노들장애인야간학교’가 탄생했다. ‘노들’은 ‘노란 들판’의 준말로, 2013년에는 ‘들판의 학교’라는 뜻을 담아 ‘노들장애인야학(野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초창기 학생은 대부분 정립전자 직원이었다. 이들은 낮에 회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노들야학에서 오후 5시부터 9시까지 공부했다.
김씨는 여기에서 공부하며 초등학교 검정고시를 1년 만에, 중학교 검정고시를 10년 만에, 고등학교 검정고시도 비슷한 시간을 들여 통과했다. 그는 1993년 11월 입학했는데 지금도 재학생이다. 2001년 오이도역 리프트 추락 사고를 계기로 한 장애인 이동권 투쟁, 2009년 비리 시설 석암베데스다요양원을 나온 ‘마로니에 8인’ 노숙 투쟁을 함께하며 ‘노들’은 한국 사회 장애인 싸움의 중심에 섰다. 2021년 3월 김씨는 천성호 활동가와 함께 노들야학의 공동 교장으로 선출됐다.
그런 노들야학이 올해로 30주년을 맞았다. 초창기부터 함께하고 있는 공동 교장 김씨는 지난 30년에 대해 “슬픈 일, 어려운 일이 많았지만 기쁜 일도 많았다”라고 말했다. 노들야학 초창기만 해도 지하철역 엘리베이터나 저상버스가 제대로 없었다. 학생들을 데려오기 위해 승합차가 곳곳을 돌아야 했다. 지금은 학생들이 대중교통을 타고 학교에 오는데 그런 장면을 볼 때 “뭉클하다”. 다만 슬프고 어려운 일은, “장애인의 권리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자기와 상관없으면 신경 쓰지 않는 사회 분위기”이다.
이제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같은 학교에서 통합교육을 받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노들야학은 없어져도 될까? 혹은 ‘장애인 야학’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세상이 더 좋은 게 아닐까? 김씨는 “제도권 교육을 받지 못한 성인 장애인에게 노들야학이 할 역할이 여전히 있다”라고 말했다. 학생 10여 명으로 시작한 노들야학에는 현재 뇌병변과 지체장애, 발달장애 학생 80여 명이 다닌다. 2008년 3월 지금의 종로구 동숭동으로 자리를 옮긴 노들야학은 내년에 오를 보증금 3000만원을 모금하고 있다. 김씨는 “장애는 바꿀 수 없지만 장애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바꿀 수 있다는 걸 노들야학에서 배웠다”라고 말했다.
전혜원 기자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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