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대지진 100년과 한 청년의 죽음

도쿄∙이령경 편집위원 2023. 9. 1. 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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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일은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 일본 정부는 조선인 학살에 국가가 관여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일본의 시민, 재일조선인, 관련 연구자들이 진실을 밝히려 한다.

지난 7월17일 정오, 도쿄 근교 사이타마시 미누마구 조센지(常泉寺)의 한 묘지 앞에 시민 30여 명이 모였다. 그곳은 ‘강대흥씨의 마음을 새기고 미래에 살리는 모임 실행위원회’가 마련한 답사의 종착지다. 묘비의 정면에는 ‘조선인 강대흥 묘’라고 쓰여 있다.

1923년부터 세워진 비에 ‘선인(鮮人)’이 아니라 ‘조선인’이라는 민족명과 개인의 이름, 9월4일 관동대지진 때라는 사망 시기, ‘소메야 일반’이라고 묘를 만든 주체까지 기재되어 있다. 이렇게 다 적혀 있는 예가 없다고 한다. ⓒ다나카 마사타카 제공

1923년 9월1일 오전 11시58분, 규모 7.9의 강진이 관동(간토) 지방을 강타했고 9월2일까지 여진 다섯 차례가 이어졌다. 이로 인해 가옥 30만여 채가 무너졌다. 사망자와 행방불명자가 10만5000명 이상이며 200만명은 집을 잃었다. 모두 살길을 찾아 피난을 떠났다.

고향에 임신한 아내를 두고 도쿄에 와 있던 조선인 청년 강대흥(당시 24세)도 피난을 떠났다. 그가 어디서 출발해 얼마나 걸어 어디로 가려 했는지 알 길이 없다. 확실한 것은 강대흥이 1923년 9월4일 새벽 2시께 당시 가타야나기촌(지금은 사이타마시 미누마구 가타야나기 지구) 소메야 구역 자경단 5명에게 잡혀 살해되었다는 사실이다. 9월3일 밤늦게 우라와를 지나 걸음을 재촉하던 강대흥은 ‘땡땡땡’ 외부인이 나타났다는 것을 알리는 자경단의 종이 울리자 도망친다. 허겁지겁 도망쳐 도착한 두 번째 마을에서도 자경단에 들켜 다시 도망치지만 결국 소메야 지구의 자경단에 붙잡힌다. 그들은 강대흥을 칼과 죽창으로 20곳 이상 찔러 죽였다.

사이타마(도쿄 근교 지역)의 자경단은 왜 조선인을 경계하고 잔인하게 살해했을까? ‘불령선인(제국 일본이 자기네 말을 안 듣는 조선인을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이라 부르던 말)이 우물에 독을 탔다, 살인 방화를 저지른다’라는 유언비어 때문일까? 아니다. 답사 해설을 담당한 세키하라 실행위원회 공동대표에 따르면, 가타야나기 지역의 경우 피난민들의 입을 통해 퍼진 유언비어보다 사이타마현 측이 각 군정촌 사무소에 보낸 통지문이 더 빨랐다. 이 통지문은 9월2일 오후 5시 사이타마현 지방과 과장이 내무성과의 회의를 마치고 현청으로 복귀한 뒤 현청의 내무부장에게 보고했고, 그 정보를 기초로 내무부장이 경찰부장과 협의해 작성했다. ‘불령선인 폭동에 관한 건 이첩’이라는 제목의 이 문서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도쿄에서 불령선인의 망동이 있고 또한 그 기간 과격한 사상(사회주의)을 가진 자들이 함께 일본인을 살해하려 드니 당국자는 재향군인분회, 소방대청년단 등과 일치단결하여 이를 경계하고, 공격을 받으면 재빨리 적당한 방책을 강구하라는 내용이었다.

100년 전 강대흥을 살해한 소메야 자경단의 후신인 자경소방단 앞에서 해설하는 세키하라 씨. ⓒ이령경 제공

사이타마현에 도착한 피난민이 9월2일 새벽 무렵 500명에서 9월3일 오후에야 3만명으로 늘어난 것을 감안하면 이들을 통해 9월2일과 9월3일 사이 사이타마현 전역에 유언비어가 확산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미 9월2일 저녁 사이타마현은 관할 군청에 전화를 해서 통지문을 전달했고 군청이 다시 관내 각 마을사무소에 문서나 전화로 알렸다. 그저 입소문이 아니라 관청이 나서서 유언비어를 생산하고 그것의 신빙성을 보증하고 빠르게 전달했다. 그 결과 9월3일부터 각 지역에서 야경 보초를 서던 자경단이 ‘불령선인’을 경계하기 위한 조직으로 바뀌거나 새로이 조직된다. 가타야나기촌 소메야구도 오후 3시께 통지문을 전달받고 소방, 재향군인청년단이 공동으로 야간 경비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약 12시간 후인 9월4일 새벽 2시께 강대흥을 죽였다.

학살에 대한 국가 책임과 민중 책임

일본 역사학자 야마다 쇼지는 각지의 신문, 공문서, 자경단의 재판 판결문 등 문헌 조사를 통해 간토대지진(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의 학살에 대한 국가 책임과 민중의 책임을 규명해냈다(이하 2023년 재발간한 〈관동대지진 재해 당시 조선인 학살과 그 후-학살의 국가책임과 민중 책임〉 참조). 지진 발생 당일인 9월1일 저녁부터 경찰관들이 조선인이 방화와 살인을 저지른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하고, 다음 날부터는 군인들도 적극적으로 유언비어를 유포하며 내무성 경보국장과 사이타마현 내무부장이 조선인 경계 지령을 내린다. 게다가 경찰관이 조선인 학살을 용인하는 발언까지 하기 때문에, ‘조선인을 여러 명 죽였다’고 자랑하는 일본인이 나올 정도였다.

관동대지진 60주년 조선인 희생자 조사 추도사업 실행위원회가 엮은 책(〈숨겨진 역사-관동대지진 재해와 사이타마의 조선인 학살사건〉, 1987)에 따르면, 강대흥을 살해한 소메야 마을 사람들도 ‘마을 사무소에서 지령을 내렸기 때문에 불령선인을 잡으면 훈장이라도 받을 줄 알았다’고 말했다. 당시 신문은 마을 사람 두 명이 자기 발로 오미야 경찰서를 찾아가 ‘악한을 잡아 못된 짓을 못하게 막았으니 상을 달라’고 했다고 보도했다. 야마다 선생은, 소메야에서처럼 자경단원이 된 당시 일본 사람들은 천황제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투철했기 때문에 ‘국가를 위해’ 주저하지 않고 사람을 죽일 수 있었으며, 그 대상이 조선인이었던 것은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 이후 조선인의 독립운동을 ‘음모·암살·방화·강도’라고 폄훼해 보도한 언론의 영향이 크다고 분석했다. 더해서 내무성 경보국장과 사이타마현 내무부장의 조선인 경계 지령, 군대의 출동과 9월2일 도쿄를 시작으로 9월4일 사이타마 지바현까지 확장된 계엄령 선포는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 민중의 박해와 학살에 기름을 부었다.

강대흥이 걸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길을 안내하던 세키하라 대표는 답사 참가자들을 마을의 ‘러일전역종군기념비’ 앞으로 데려갔다. 이 기념비는 러일전쟁의 승리에 공헌한 사람들에 대한 감사와 출정한 사람들의 긍지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일본 각지에서 볼 수 있다. 뒷면에 이름이 새겨진 참전군인들 중 한 사람이 강대흥을 살해한 자경단의 지휘관이었다. 그는 20대에 러일전쟁에 참전해 타민족을 살해한 적이 있으며, 조선의 민중들과 싸우면서 조선 민중들의 저항과 반감에 직면했다. 그는 조선인에 대한 차별의식이 내재화된 제국 일본의 신민이었다.

세키하라 씨가 러일전역종군기념비 앞에서 자경단 지휘자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이령경 제공

더 심각한 문제는 학살 그다음이다. 국가권력은 국가책임을 피하기 위해 조선인에 의한 일부 폭행을 ‘다수의 사실’로 선전했고, 학살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자경단에게 전가했다. 그렇다고 자경단이 제대로 된 처벌을 받았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정상참작을 통한 집행유예가 많아 실제로 투옥된 비율이 낮았다. 강대흥을 죽인 소메야의 자경단 5명도 살인죄가 아닌 상해치사죄로 집행유예를 받았을 뿐이다. 야마다 선생은 자경단에 대한 재판은 ‘보여주기식 재판’이라고 비판한다.

재판 이후 특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조사한 세키하라 대표는 1924년 3월15일 소메야 자경단 5명도 특사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당시 일본 정부가 단행한 황태자의 결혼 기념 ‘특별 특사’로 이 5명의 유죄 사실마저 깨끗이 지워졌다. 이 특사로 조선인 학살의 원인이 된 사이타마현 당국의 ‘이첩’에 대한 책임은 은폐되고 강대흥 학살 사건은 ‘종료’되었다.

관동대지진 당시 학살당한 조선인 피해자 명부가 없다. 누가, 어디서, 어떻게, 얼마나 학살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당시 일본 정부는 조선인인지 아닌지 구별하지 못하게 조선인 피해자의 사체를 재빨리 화장했다. 그리고 직접 진상 조사에 나선 조선인 유학생들의 활동을 방해했다. 1945년 패전 이후에 새롭게 들어선 일본 정부의 태도도 다를 게 없다. 1923년 12월15일 제국의회 중의원 본회의에서 나가이 류타로 의원이, 후나바시 해군 무선전신송신소에서 타전한 내무성 경보국장의 전보 등 정부기관이 유언비어를 퍼뜨린 증거를 내보이며, 정부 책임을 밝히고 학살 피해자와 유족을 위로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강구하라고 촉구했다. 당시 정부는 ‘조사 중’이라고만 답했다.

100년의 공백을 메워온 시민들

그리고 2023년 5월23일과 6월15일 일본 입헌민주당과 사회민주당의 의원이 직접 대정부 질의를 했다. 대정부 질의에 앞서 2015년부터 8차례에 걸쳐 야당 의원들은 정부에 질의서를 제출했다. 국립국회도서관 등에 소장된 사료를 근거로 조선인과 중국인 학살 사실 인정과 그 후 조사, 당시 정부 대응에 대한 현 정부 인식 등 견해를 물었지만, 정부는 ‘정부 내에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이 없으므로’ 사실에 대한 평가와 조사를 할 생각이 없다는 답변만 되풀이했다. 그래서 결국 100년 만에 국회에서 대정부 질의를 하게 된 것인데, 서면과 같은 궤변을 늘어놓으며 조선인 학살에 국가가 관여한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지금까지 진행된 연구와 운동을 통해 밝혀진 사료와 성과를 외면한 채, 지금 자신들 손(정부 내)에 사료가 없다면서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기만적 태도로 일관했다.

이런 일본 정부를 대신해 일본의 시민, 재일조선인, 관련 연구자들이 100년의 공백을 메우며 진실을 향해 전진한다. 이들은 도쿄도·가나가와현·지바현·사이타마현·군마현에서 발생한 일부 학살 실태와 군대·경찰·주민들의 관여 사실을 밝혀냈다. 해방 후 재일조선인들이 시작한 위령제는 각지로 번져 이어지고 있다. 100년을 맞은 올해 각종 관련 행사들은 조선인과 중국인 학살에 대한 국가책임과 함께 일본 민중의 책임을 거론한다.

관동대지진재해 조선인 중국인 학살 100년 희생자 추도대회 전단지. ⓒ추도회 실행위원회 제공

일본 민중에게는 과거 학살에 가담한 책임을 반성하는 것은 물론 지금의 일본 정부에 진상규명을 요구해야 할 책임이 있다. 100년 동안 그것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일본 사회에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을 부정하거나 학살을 정당화하는 책자가 버젓이 발간되고 있다. 이 주장을 근거로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는 ‘조선인 학살에 대한 여러 설이 있다’며 2017년부터 조선인 희생자에게 추도문 보내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일본 정부의 조사 거부와 고이케 도지사의 행동이 역사를 왜곡하는 세력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강대흥씨의 마음을 새기고 미래에 살리는 모임 실행위원회’는 우리가 가야 할 미래를 향해 움직인다. 실행위원회는 오는 9월4일 강대흥의 손자를 일본에 초청해 함께 추도식을 지낸다. 그날 조센지에 잠든 강대흥과 고향에 가묘를 만들어 100년 동안 제사를 지내온 후손이 만난다.

도쿄∙이령경 편집위원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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