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R&D 예산 삭감보다 더 중요한 것

최상국 2023. 9. 1. 06:1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데스크 칼럼

[아이뉴스24 최상국 기자] '마이너스 16.6%'

정부가 과학기술계에 칼을 빼들었다. 내년도 정부 연구개발(R&D) 예산을 16.6% 삭감했다. 세수부진으로 나라 살림이 어려워지자 당장 급하지 않은 R&D 예산을 칼질해 더 급하다고 여겨지는 곳에 나눠준 모양새다.

정부는 지난 29일 국무회의에서 '2024년 예산안'을 확정했다. 내년 예산안은 '건전재정'을 위한 '재정정상화'에 방점이 찍혔다. 내년도 국세수입 등 총수입이 올해보다 2.2% 감소할 것으로 예측하면서 총지출은 역대 최저치인 2.8% 늘리는 데 그쳤다.

윤석열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모든 재정사업을 원점에서 재검토해 정치 보조금 예산, 이권 카르텔 예산을 과감하게 삭감했고, 총 23조 원의 지출구조조정을 단행했다"며 "이를 통해 확보한 재원은 국가가 반드시 해야 할 일에 집중적으로 투입했다"고 말했다.

"과감한 삭감"의 주 타깃은 R&D 예산이 됐다. '2024년 예산안'에서 R&D분야는 올해보다 16.6%(5조2000억원) 줄어든 25조9152억원.

외교·통일' 분야가 19.5%, '보건·복지·고용' 분야가 7.5% 늘어나는 등 12대 예산 분야 대부분이 늘어난 가운데 R&D 분야만 두 자릿수의 삭감률을 기록했다. 이로써 정부 R&D 예산은 1991년 이후 33년만에 역성장하고, 정부 총 지출 대비 R&D 투자규모는 2003년 이후 21년 만에 처음으로 3% 대로 떨어지게 됐다.

정부는 "재정이 아무리 어려워도 국가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에서 과학기술을 맨 마지막 자리로 밀어냈다. 내년 예산안과 함께 발표된 중기재정운용계획에서도 2023~2027년 총지출 연평균 증가율을 3.6%로 제시하면서, R&D는 12대 분야 중 가장 낮은 0.7% 증가율을 책정함으로써 앞으로 5년간은 R&D 예산을 동결할 계획임을 명확히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2023.08.29. [사진=뉴시스]

R&D 예산 삭감은 지난 6월28일 윤석열 대통령이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제로베이스 재검토"를 지시했을 때부터 예고됐던 상황이다. 이후 약 두 달 동안의 예산 재검토 과정에서 삭감·폐지될 사업들이 속속 통보되면서 과학기술계는 패닉에 빠져 있다. 진행중인 연구과제가 중단되거나 예정된 연구원 채용을 보류하는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지난 정부 시기 소부장, 코로나19 등 긴급현안이 발생하면서 급격히 늘어난 R&D 예산의 일부 구조조정은 필요하다고 수긍하던 연구자들도 막상 16.6%라는 충격적인 삭감률이 현실화되자 "어떻게 이런 식으로 과학기술계를 몰아세울 수 있나"는 항변이 곳곳에서 터져나온다. 연구현장과 소통도 없이 삭감률을 일방적으로 정해 놓고 밀어붙였다며 목소리를 높여가고 있다.

하지만 정부가 R&D 예산을 삭감하는 것으로 과학기술계 구조조정을 마무리할 것 같지는 않다. 윤 대통령은 R&D 예산 재검토를 지시하면서 과학기술예산을 '나눠먹기, 갈라먹기'하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R&D 카르텔'이라는 표현까지 나왔다.

윤 대통령은 29일 국무회의 마무리 발언에서 "회계를 보면 기업이 보이고 예산을 보면 정부가 보인다"고 말했다고 한다. 말 그대로 내년도 정부 예산안에는 정부가 과학기술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드러나 있다. 한편으로는 R&D 시스템을 개혁하겠다는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가 읽힌다. 16.6%라는 삭감률은 단지 예산만 줄이는 걸로 끝내지 않겠다는 확실한 의사표현이다. 이 참에 과학기술혁신 시스템과 관련한 해묵은 과제들을 제대로 해결할 수 있다면 바람직한 일이다.

문제는 혁신의 방향, 혁신의 방법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지난 22일 내년 R&D예산안을 발표하면서 '정부R&D 제도혁신 방안'도 함께 내놓았지만 과거 여러 정부에 걸쳐 반복해 온 'R&D 혁신안'의 재탕에 불과해 과기계를 실망시켰다. 오히려 정부R&D 과제를 '가치를 공유하는' 외국 연구기관에 개방한다거나, 상대평가를 도입해 하위 20%를 구조조정한다거나, 연구수당을 축소한다는 등의 내용은 가뜩이나 불만이 쌓인 연구자들의 반발을 부르고 있다.

이번 R&D 제도혁신안의 첫 머리에 최소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과학기술혁신본부를 포함한 과학기술 거버넌스 혁신안을 담았어야 그나마 명분이라도 내세울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게 과학기술계의 중론이다.

정부는 "예산 50%를 삭감해도 좋다. 대신 연구 자율성을 달라"는 연구자들의 목소리에도 귀기울여야 할 것이다.

/최상국 기자(skchoi@inews24.com)

Copyright © 아이뉴스24.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