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몸은 일의 기억을 새기는 성실한 기록자

이유진 2023. 9. 1.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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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 통역사 장진석씨는 평소 늘 몸에 지닌다는 결혼 예물 시계를 무대에 오를 때는 풀어둔다.

"몸은 일의 기억을 새기는 성실한 기록자"라고 저자는 말한다.

"내가 몸을 만지는 게 아니라 마음을 만져주는 그런 일을 하는구나." 최씨의 말에 나는 내 일과 불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된다.

성큼성큼 발로 벽을 짚으며 하강하는 로프공의 몸짓에 감탄하다가도 "왜 자기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죽음을 염두에 두며 일해야 할까"라는 저자의 질문을 곱씹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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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의 몸
일의 흔적까지 자신이 된 이들에 대하여
희정 지음, 최형락 사진 l 한겨레출판 l 2만원

수어 통역사 장진석씨는 평소 늘 몸에 지닌다는 결혼 예물 시계를 무대에 오를 때는 풀어둔다. 시선을 분산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지만 통증 때문이기도 하다. 그 작은 무게도 30분에서 1시간가량 팔을 가슴께 위로 올린 채 움직이다 보면 천근처럼 느껴진단다. 손가락에서부터 시작된 통증은 어깨를 거쳐 목과 허리 통증으로 이어지지만 “온몸으로 표현되는 아름다운 언어를 전하는 대가”다.

반도체 직업병 문제를 다룬 르포집 ‘삼성이 버린 또 하나의 가족’ 등을 쓴 기록노동자 희정이 이번에는 ‘베테랑’ 노동자 12명을 만나 그들의 몸에 주목했다. 30대 여성부터 아흔 살의 남성까지 서로 다른 연령·성별·분야의 이들은 수십 년간 일을 몸에 붙여와 일의 흔적이 곧 자신이 됐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몸은 일의 기억을 새기는 성실한 기록자”라고 저자는 말한다. 동시에 “몸에 성실히 새겨진 노동의 기록은 대가를 요구한다.” 1년이면 4000명의 몸을 미는 세신사의 손끝은 젖었다 마르기를 반복하며 갈라졌고, 작고 호리호리하던 조리사의 몸은 20㎏짜리 쌀 포대를 번쩍번쩍 들다가 어느새 딴딴해졌다. 활자만으로는 오롯이 상상하기 힘든 몸의 변화를 사진작가 최형락이 입체적으로 포착했다.

책은 몸에 대한 이야기지만 마음에 대한 이야기이고, 베테랑의 이야기지만 베테랑 주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20년 경력의 시각장애인 안마사 최금숙씨는 ‘직업이 되고 봉사도 된다’는 말에 끌려 시력을 잃은 지 6년 만에 집 밖을 나와 안마를 배웠다. 그는 특히 어르신 고객들이 자신을 기다려 들려주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지난 밤 꿈부터 살아온 세월까지. “내가 몸을 만지는 게 아니라 마음을 만져주는 그런 일을 하는구나.” 최씨의 말에 나는 내 일과 불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된다.

그러나 베테랑의 몸은 종종 위험에 노출된다. “줄 탈 때가 제일 편하다”는 로프공(로프를 이용한 고소 작업자)을 만나고 온 저자는 “이 성실하고 재주 많은 로프공이 ‘내 안전은 내가 지키는 것’을 베테랑의 덕목으로 여기지 않는 세상을 바란다”고 빌었다. 산업안전보건법에는 고소 로프 작업에 관한 세부 규정이 없다. 그물망을 설치하면 좋지 않을까 싶지만, 애초 건물에는 그물망 하나 걸 고리조차 없다고 한다. 성큼성큼 발로 벽을 짚으며 하강하는 로프공의 몸짓에 감탄하다가도 “왜 자기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죽음을 염두에 두며 일해야 할까”라는 저자의 질문을 곱씹게 된다.

이유진 기자 y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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