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바조 그림 속 ‘맨발’이 뜻하는 것은? [책&생각]
대형 판형에 펼쳐진 생생한 그림들
극단적 명암 대비, 사실적 인물 묘사
가톨릭개혁 운동 속 핀 ‘자연주의’
불멸의 화가 카라바조
고종희 지음 l 한길사 l 12만원
‘카라바조’라 불리는 미켈란젤로 메리시 디 카라바조(1571~1610)는 바로크 회화의 선구자로 가장 큰 발자취를 남긴 이탈리아 화가다. 카라바조의 그림을 한 점이라도 소장하고 있는 미술관은 십중팔구 그의 그림을 도록의 표지로 쓸 정도로 서양미술사에서 그는 가장 추앙받는 화가로 꼽힌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올해 6월부터 영국 내셔널갤러리가 소장한 명화 50점을 들여와 전시회를 열고 있는데, 라파엘로, 렘브란트, 벨라스케스 등 기라성 같은 화가들의 그림 중 전시의 포스터를 장식한 것도 카라바조의 ‘뱀에 물린 청년’이었다.
1980년대 초 이탈리아 피사대학교에서 공부하던 시절 카라바조를 접한 미술사학자 고종희 한양여대 명예교수는 그에게 매료되어 이탈리아 북부에서 남부까지 그의 그림과 발자취를 찾아다니는 등 카라바조를 깊이 연구해왔고, 이를 집대성해 ‘불멸의 화가 카라바조’란 책으로 펴냈다. 카라바조의 삶과 작품 세계, 서양미술사에서의 의미까지 유기적으로 다룬 지은이의 노력에, 가로 24㎝, 세로 28㎝의 대형 판형으로 카라바조의 작품 73점을 포함해 전체 129점의 작품을 품은 책의 물성이 큰 힘을 보탰다.
첫머리에서 지은이는 카라바조의 출생지가 정작 카라바조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힌다. 2007년 한 미술애호가의 탐구로 카라바조가 밀라노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이 드러난 것이다. 어린 시절을 카라바조에서 보내긴 했으나, 밀라노라는 지역은 카라바조의 작품 세계 형성에 여러모로 큰 영향을 미쳤다. 카라바조 회화의 가장 큰 특징은 빛과 어둠을 극명하게 사용해 극적인 효과를 연출하는 것으로, 이 ‘테네브리즘’은 카라바조 이후 렘브란트, 벨라스케스, 루벤스 등 바로크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지은이는 르네상스 명암법을 종합한 티치아노(티치아노의 제자 시모네 페테르차노가 카라바조의 스승이었다), 밀라노에 머무르며 빛의 효과를 실험하고 그린 레오나르도 다빈치, 정교한 정물화의 경지를 만들어 이탈리아에 소개된 플랑드르 회화 등 카라바조의 작품 세계 형성에 영향을 준 여러 갈래들을 상세하게 추적한다.
“카라바조의 천재성은 기존의 작품을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여 완전히 다른 장르로 탄생시킨 데 있었다.” 지은이는 카라바조의 ‘모방’에 주목하는데, 그의 모방은 인물의 재현만이 아닌 “주인공을 통해 이야기를 만들어냄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카라바조의 ‘성 베드로의 순교’는 미켈란젤로가 바티칸 바오로 경당 벽에 그린 ‘성 베드로의 십자가형’에서 영향을 받았으나, 거꾸로 세워지는 십자가에 매달린 베드로의 모습을 마치 스리디(3D) 프로그램 다루듯 좌우로 반전시켰다. 40명 이상의 등장인물들을 단 4명으로 단순화하고, 배경을 검정으로 칠하는 등 극단적인 명암을 넣었다. 별다른 장식과 치장 없이, 관객들로 하여금 마치 연극 무대를 보듯 온전히 주인공의 이야기에만 집중시킨 것이다. 이처럼 카라바조는 이전 화가들의 성취들을 거리낌 없이 가져다 쓰면서도 이를 자기 식으로 독특하게 변형시켰다. 이미 1664년에, 비록 부정적인 의미로 쓰긴 했으나 카라바조의 전기를 쓴 피에트로 벨로리는 가식과 권위, 위선과 장식이 없는 그의 작품 세계를 ‘자연주의’라 일컬었다.
지은이는 이 같은 카라바조의 작품 세계와 당시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에 맞서 영성을 강조하며 청빈·금욕·구빈 등을 펼쳤던 가톨릭개혁 운동 사이의 밀접한 관계에 주목한다. 보로메오 가문과 콜론나 가문 등 카라바조의 주된 후원자들은 대체로 가톨릭개혁 운동에 앞장섰던 무리였다. 그의 핵심 후원자였던 밀라노 대주교 페데리코 보로메오(1564~1631)는 예수회를 창설한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오라토리오회를 창설한 성 필립보 네리와 함께 가톨릭개혁 운동을 이끈 3대 성인으로 꼽히는 카를로 보로메오와 사촌지간으로, 교회와 갈등을 빚기 전까지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를 후원하기도 했다. 화려한 장식 없이 단순하고 검은 배경에 가난한 사람이나 서민 등을 주로 그렸고, “주름진 얼굴, 더러운 피부, 마디진 손가락, 병자의 손발”을 사실적으로 묘사했으며 성모마저도 몸이 퉁퉁 부은 모습으로 그린(‘성모 마리아의 죽음’) 카라바조의 ‘자연주의’는, 교회의 권위를 내려놓고 평범하고 가난한 사람과 함께하려던 “가톨릭개혁 운동의 정신을 시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지은이가 주목한 것이 카라바조의 그림에 자주 등장해 눈길을 끄는 ‘맨발’이다. 가톨릭개혁 운동은 ‘작은형제회’를 설립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1181~1226)를 모범으로 삼았는데, 작은형제회 수사들은 영성을 실천하기 위해 맨발로 다니는 등 극단적으로 가난한 삶을 살았다. ‘로레토의 마돈나’ 등 카라바조 작품 대부분에서 등장인물들은 주로 맨발로 그려졌는데, 이는 가톨릭개혁 운동의 정신이 반영된 대목이라는 풀이다.
그러나 1605년 교황으로 선출된 바오로 5세는 개혁적 성향이던 이전 교황들과 달리 “현실의 화려함을 즐기는 성향”이었고, “이로 인해 미술에서는 카라바조의 사실적인 그림풍보다는 안니발레 카라치, 귀도 레니, 베르니니 등으로 대표되는 화려하고 역동적인 바로크 미술이 힘을 얻게” 된다. ‘뱀의 마돈나’, ‘성모 마리아의 죽음’ 같은 작품들이 원래 설치됐던 자리에서 철거되는 등 이전까지 로마에서 잘 나갔던 카라바조에게도 불행이 찾아왔다. 1606년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인 그는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팔리아노, 나폴리, 몰타 등으로 도피를 다니며 사면을 기다렸으나,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다치는 등 지속적으로 ‘사고를 쳤’다. 1610년 사면받기 위해 로마로 향하던 중 토스카나의 에르콜레란 마을에서 말라리아 또는 식중독으로 추정되는 이유로 38년의 짧은 삶을 마감했다. 카라바조가 씨를 뿌린 바로크 회화는 이후 루벤스, 렘브란트, 벨라스케스 같은 거장들에 이르러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단독] ‘그런 식이면 농업정책 파탄’…이균용, 해명과 정반대 판결했다
- “차라리 홍범도·백선엽 흉상 한자리 두자…항일·친일 알도록”
- “사즉생” 배수진 친 이재명…사법리스크에 효과 회의론
- 박정훈 대령 입건 이튿날…군검사 “무서운 일, 사본 잘 보관하라”
- 1년에 137일 굶는다…‘북극곰의 눈물’ 닦아줘야 할 과학적 이유
- 국방부, ‘홍범도 흉상 존폐’ 꼼수…한 총리 “함명 수정 검토”
- 우럭탕 한 그릇 비운 윤 대통령 “상인들 힘 나면 좋겠다”
- 이균용 후보자 아들, 대학 1학년 때 ‘김앤장 인턴’ 특혜 의혹
- 정부 스스로 손 묶은 통화·재정정책…한국경제 ‘상저하저’ 되나
- 스무살 멜론, 유튜브뮤직 주저앉히고 왕좌 지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