볏잎 갉아먹는 ‘혹명나방’ 기승…올해 벼 생산량 영향 우려
지난해보다 피해규모 훨씬 커
방제도 효과 없어 “농사 망쳤다”
모내기 늦는 가루쌀 상황 더 심각
원리 다른 약제 교차 사용 권장
날씨 선선한 9월 확산 꺾일 수도
“생각지도 못했던 혹명나방 때문에 올 벼농사는 완전히 망쳤어요. 피해가 심한 논에서는 벼를 거둬봐야 콤바인 비용도 못 건질 지경이라 수확을 포기할까 고민 중입니다.”
올여름 더위와 장마가 길어지면서 중국에서 건너온 혹명나방이 기승이다. 특히 충남·전북·전남·경남 지역 해안가를 중심으로 피해가 확산하는 분위기다. 혹명나방 애벌레는 볏잎을 갉아 먹고 즙을 빨아 벼 생육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어 농정당국과 벼농가는 수확기를 앞두고 긴장하는 모습이다.
◆충남 피해 극심, 태안은 전체 논 면적 90%가량 피해 봐=8월29일 찾은 충남 태안군 근흥면 두야리 일대 논. 시기상 진한 초록빛을 뽐내야 할 논이 희끗희끗했다. 벼 위로는 조그맣고 누런 벌레들이 날아다녔다. 언뜻 보기에는 몇마리 되지 않았는데 벼 사이를 헤집으니 수천마리가 한꺼번에 날아올랐다. 올해 서해안 지역에 혹명나방이 대규모로 발생했다는 말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곳에서 26㏊(8만평) 규모로 벼농사를 짓는 최성복씨(56)는 “혹명나방이 7월말 이삭거름 살포 이후 조금씩 보이더니 이제 ‘창궐’ 수준으로 급증했다”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26㏊ 전체에서 혹명나방 피해가 생겼고 일부 논은 수확이 불가능할 정도”라고 하소연했다.
혹명나방은 볏잎을 길게 원통형으로 말고 그 안에 알을 낳는다. 알에서 태어난 유충이 잎을 갉아 먹기 때문에 잎은 표피만 남아 백색으로 변한다. 피해가 심해지면 출수 불량, 등숙기 지연 등으로 이어져 수확량이 떨어질 수 있다. 올해 혹명나방 발생 정도가 평년보다 훨씬 심하다는 게 지역농민들의 한결같은 의견이다. 시·군별로 평년보다 최대 6배 이상 많이 발생했다는 게 충남도농업기술원의 설명이다.
◆호남과 경남권도 피해 확산=전북 역시 8월16일 기준으로 군산·김제·부안 등에서 혹명나방 피해가 나타났다. 도내 각 시·군은 8월29일부터 혹명나방 발생 논에 대한 추가 조사에 들어갔다. 도 관계자는 “추가 조사를 하면 현재 발생면적보다 4∼5배 늘어날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전남에서는 해남·진도·고흥·영암 등을 비롯한 대부분 지역에서 혹명나방 피해를 봤다. 김호일 해남군 산이면 지사마을 이장은 “어떤 곳은 전체 농경지의 3분의 2가 하얗게 변했을 정도”라며 “약을 쳐도 혹명나방이 없어지지 않아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했다.
특히 일반벼보다 모내기가 늦게 이뤄지는 가루쌀(분질미)을 심은 논에서 피해가 더 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남에서는 하동·창원 등지에서 피해가 큰 것으로 파악됐다. 창원시농업기술센터에 따르면 관찰 농지의 피해엽률(전체 벼 이파리 개수 대비 피해를 본 이파리 비율)은 5%대다.
경남도농업기술원 관계자는 “올해는 경남지역에 평년보다 혹명나방이 일찍 발견됐다”면서 “불볕더위가 빠르게 찾아온 데다 장마까지 길어지면서 지난해보다는 확실히 피해규모가 크다”고 전했다.
농촌진흥청도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다. 8월16일 전국 피해 조사를 마치고, 9월1일부터 재조사에 들어갔다. 8월16일 기준으로 피해 추정 규모는 충남이 1만804㏊로 가장 크고 전남(3174㏊)·경남(598㏊)·전북(443㏊)이 그 뒤를 이었다.
◆수확기 앞두고 생산량 영향 미칠까=혹명나방의 창궐 원인으로 이상기후와 그에 따른 방제 지연이 꼽힌다. 손변웅 충남도농기원 재해대응팀 지도사는 “올해 혹명나방이 크게 늘어난 것은 장마가 20여일 동안 지속하면서 중국에서 많은 혹명나방 유충과 성충이 서해안에 상륙했기 때문”이라며 “혹명나방은 질소를 좋아하는데 장맛비가 대기 속 질소와 같이 떨어져 땅에 질소가 풍부해진 점도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23년째 전북 김제시 광활면에서 50필지 규모로 벼농사를 짓고 있는 백인엽씨(43)는 “보통 약을 주면 잎에 약제가 고착돼 효과가 나는데 올해는 방제하고 나면 장맛비가 쏟아진 탓에 약제가 씻겨 내려가 도무지 혹명나방 유충이 줄어들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농정당국은 농가에 효과적인 방제를 주문한다. 충남 홍성군농업기술센터 관계자는 “성충이 많이 날아다닌 뒤 7∼10일 지나고 성충이 잎을 말기 전 방제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며 “작용기작이 다른 약제를 교차해 사용하고 이화명나방·멸구류 같은 다른 해충 방제도 함께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채의석 농진청 병해충대응팀 지도관은 “성충은 오후부터 활발하게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면서 “바람이 불지 않고, 습하지 않은 날씨에 오후 시간대 방제에 나서면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혹명나방 피해 확산으로 산지에서는 올 벼 수확량 감소가 불가피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김경채 광주·전남미곡종합처리장(RPC)협의회장(해남 황산농협 조합장)은 “피해를 당한 논의 수확량 감소는 불가피하다”며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예년 수준의 수확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혹명나방 피해가 벼 생산량 감소에 제한적으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벼멸구나 도열병과 달리 이삭보다는 잎에 피해를 더 많이 주는 탓이다.
채 지도관은 “날씨가 선선해지는 9월초부터 혹명나방 확산세가 한풀 꺾일 것”이라면서 “병충해 발생 정도가 지역별·농가별로 편차가 크고,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공동방제에 나서고 있는 점을 고려했을 때 혹명나방 피해에 따른 벼 생산량 영향은 좀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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