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철주의 옛 그림 이야기] 구태여 여인의 뒷모습을 그린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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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여인의 패션은 머리에서 시작된다.
이 화첩 속에 올림머리와 머리쓰개를 한 여인들이 등장하는데, 장옷을 펄럭이거나 전모를 쓴 주인공이 유난히 맵자한 매무시를 자랑한다.
하필이면 뒷모습 그림이다.
우리 옛 그림에서 뒷모습이 주 소재가 된 예는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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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돌린 자태 담아 궁금증 불러
화가 별명 ‘삿갓 쓴 사내’와 겹쳐
조선 여인의 패션은 머리에서 시작된다. 쪽을 찐 머리에 올리는 첩지는 앙증맞다. 새앙머리에 꽂은 떨잠은 바르르 떨린다. 귀밑머리는 제비부리댕기가 달려 달랑거리고, 종종머리를 한 소녀의 도투락댕기는 볼수록 귀염상이다. 머리 꾸미기가 아니어도 쓰개로 멋을 부린다. 이름마저 정겨운 조바위·남바위·풍차·아얌이 다 모자다. 이들은 나들잇길의 치레가 되거나 따듯한 겨울 차림새로 어울린다.
성숙한 여인의 겉보기는 구색을 더 갖춘다. 이를테면 너울이나 처네, 전모나 장옷이 뒤따른다. 알고 싶다면, 혜원 신윤복이 그린 풍속화 6점을 묶은 ‘여속도첩(女俗圖帖)’을 펼쳐보라. 이 화첩 속에 올림머리와 머리쓰개를 한 여인들이 등장하는데, 장옷을 펄럭이거나 전모를 쓴 주인공이 유난히 맵자한 매무시를 자랑한다.
개중에 수수한 볼거리가 되는 치장을 고르라면 곧 ‘처네’다. 서민층 부녀가 낯가림하려는 방편으로 애용한 처네는 어깨를 덮을 정도의 폭에 깃과 동정을 붙이고 끈을 달아 머리에 썼다.
혜원이 그린 ‘처네 쓴 여인’을 바로 구경해보자. 지붕은 가지런해도 벽체가 너덜너덜한 기와집, 그 담벼락 샛길로 여인이 걸어간다. 얼굴을 숨기려고 머리에 처네를 썼다. 하필이면 뒷모습 그림이다. 청록색 치마 길이가 강동해서 슬며시 속바지가 나왔다. 분홍신은 어여쁘고 작달막한 키에 펑퍼짐한 뒤태가 수더분하다. 조선의 나부죽한 여염집 부녀자 이미지에 이처럼 딱 들어맞는 그림도 드물 테다. 행여 또 모르겠다. 옛적 복식에 어두운 젊은이는 핼러윈에 유령 분장한 캐릭터가 아니냐며 오해할지도.
처네는 얼굴 가리개인데, 뭐가 부족해서 화가는 구태여 뒷모습으로 그렸을까. 여인을 그린 인물화는 앞모양이 나오기 마련이다. 비스듬히 얼굴을 돌릴 수는 있어도 이목구비가 빚어내는 표정을 곱다시 따라가는 것이 미인도의 전형이다. 우리 옛 그림에서 뒷모습이 주 소재가 된 예는 드물다. 곱씹어보니 딴생각도 든다. 얼굴이 보일 때보다 더 궁금증이 드는 게 뒷모습 아닌가. 혜원은 이 여인의 얼굴을 일부러 숨겼을까.
중국은 조선과 달리 얼굴 돌린 그림이 꽤 있다. 이른바 ‘배면(背面)미인도’라 했다. 왜 얼굴을 감추는지 화가는 입을 다무는데, 시인들이 시를 지어 왈가왈부했다. 청나라 진초남은 ‘뒷모습의 미인도에 부쳐’라는 시로 입을 뗀다. ‘등 돌린 미인, 난간에 기대네/ 섭섭해라, 꽃다운 얼굴 안 보여/ 불러보아도 돌아서지 않으니/ 어리석게도 그림 뒤집어서 본다네’. 행간에 서린 시인의 장난스러운 호기심이 마냥 우습다.
그런가 하면 같은 제목으로 명나라 고계도 한수 거든다. 그의 시는 속이 의외로 깊다. ‘불러서 고개 돌리려 해도 이름을 몰라/ 돌아서 맞는 봄바람에 얼마나 마음 뺏겼을까/ 화가여, 앞모습 못 봤다고 말하지 마소/ 미인은 보인다 해도 그리기가 어려울 테니.’
그림 속에 그린 때가 옛 간지(干支)로 적혀 있다. ‘을축년 초가을에 혜원이 그리다.’ 을축은 1805년이다. 마침 인장에 새겨진 글씨를 보니 참으로 얄궂다. ‘삿갓 쓴 사내’라는 뜻의 ‘입보(笠父)’다. ‘입보’는 신윤복의 자(字)이다. ‘삿갓 쓴 사내’가 ‘처네 쓴 여인’을 그린 셈이 아닌가. 그린 이와 그려진 이가 다 얼굴 감추고 싶으니 이 또한 공교롭다. 혈기 방장하기로 소문난 혜원이라 그 속내평은 짐작하기 어렵다. 예술은 이따금 은미(隱微)한 수작을 부린다. 아서라, 말아라, 처네 속 얼굴 엿보는 짓은.
손철주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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