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 'SF' 행동하는 김현의 시 세계에서 피어난 소설들 [책과 세상]
5년간 쓴 단편 11편…날카로운 사회 고발 여전
퀴어·소수자 목소리 담고 SF 재미 더한 작품들
무너질 듯한 인생에도 결국 사랑, 서로 기대며
김현(43)의 첫 소설집 '고스트 듀엣'은 그의 첫 시집 '글로리홀'(2014)을 퍽 닮았다. 퀴어의 서정, 소수자 옹호, SF적 상상력이 흥미롭게 뒤섞여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세계는 죽음에 가까이 있다 나에게 사랑은 가까운 것이다" 9년 전 작가가 쓴 '시인의 말'대로 죽음과 사랑을 끌어안으려는 마음도 변함없어 보인다. 심지어 "이 책은 시집일까, 소설집일까"(박상수 문학평론가)라는 질문을 품게 했던 첫 시집의 실험적 면모를 미루어 보면, 그가 소설을 쓰고 묶어 책을 낸 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소설집에는 작가가 지난 5년간 쓴 단편 11편이 실렸다. 귀신과 유령 같은 초자연적 현상이나 홀로그램이나 가상현실 등 SF적 소재를 통해 산 사람과 죽은 사람, 과거와 현재를 잇는 이야기들이다. (한 수록작 제목처럼)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도 있나' 싶은 한국 사회 속 작고 작은 인물들이 나오고, 이들은 "언제나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지만 오늘을 살고 내일을 바라볼 수 있는 동력을 찾아간다. 2009년 등단 이후 시작(詩作)을 통해, 그리고 활동가로서 현장에서 거침없이 사회 문제를 고발해 온 작가는 소설에서도 혐오와 차별, 폭력의 시대를 버텨내고 있는 이들을 응시한다. 중년 레즈비언 커플, 가난한 청년 게이 커플, 사회적 재난 이후 살아남은 사람. 그 현실의 소묘는 아찔할 정도로 정밀하다.
수록작 '유미의 기분'은 일상 속 혐오와 차별을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교사 '형석'은 자신이 웃자고 한 드라마 얘기에 정색한 학생 '유미'에게 당혹감을 느낀다. "여자는 꼬리가 아홉이라서 꼬리를 잘 친다."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냐고 따져 묻는 유미의 얼굴을 휴일 내내 생각한다. 유미는 '내가 입술로 인공호흡 해줄까' '예쁜 학생이 내 무릎에 앉으면 수행평가 만점 준다' 등 교사들의 문제 발언을 적은 포스트잇을 복도에 줄줄이 붙이는 "장난"을 친 아이다. 유미의 화살이 잘못된 곳을 향한 거 아닌가. 평소 성별로 갈라치길 하면 "오히려 게이인 내가 이도 저도 아니어서 당하는 게 더 많다"고 생각하는 형석은 억울하다.
그런 형석을 향해 친구는 에두르지 않고 말한다. "너만 웃은 거. 걔만 빼고 다 웃은 거." 그게 잘못이라고. 여성·동성애 혐오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쏟아내며 웃던 대학 동문들 사이에서 웃을 수도 입을 열 수도 없던 과거가 그제야 떠오른다. 공감의 범주가 넓어진 순간이다. 형석이란 인물은 작가의 질문, 그 자체다. 나만 웃은, 혹은 그 자리에 단 한 사람만 빼고 웃게 만든 '농담'을 한 적 없는지.
날선 비판을 담았지만 책은 포근하다. 시종일관 사랑을 말하는 작가 때문이다. 형석이 유미에게 정중히 사과하는 행위의 밑바탕에, 선배의 낭독회를 가는 대신 전 연인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일형'('내 마음 알겠니')의 가슴 한편에 저마다의 사랑이 있다. 내일을 꿈꿀 수 있게 하는 사랑이다. 표제작도 마찬가지다. 죽은 연인을 홀로그램 기술로 재현해 데리고 다니는 '상민'에게 같은 아픔을 겪은 친구는 말한다. 떠난 사람이 일상에서 불쑥불쑥 생각나는 게 당연하니 그냥 아무 때나 어디서나 말하고 살라고. 그 후 상민은 자신의 소설에 "무너지지 않았기에 서로의 이름을 자주 부르는" 인물들을 그려낸다. 김현의 소설 속에는 그렇게 "서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연결될수록 강하다"는 말을 믿는 이들이 독자를 기다리고 있다.
SF적 상상력은 재미를 끌어올린다. 표제작의 홀로그램 외에도 수록작 '가상투어'에서는 가상 현실 여행이 보편화된 세계, '수영'에서는 인공지능(AI) 기반 3D 가상인간과 메타버스 플랫폼이 대중화된 세상이 펼쳐진다. 문장은 경쾌하고 유머러스하다. 예컨대 귀신인 '은숙'이 트로트 서바이벌 프로그램 참가자 '동찬'을 밤새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바람에 동찬이 가위에 눌리는 장면('수월')에서 피식 웃음이 터진다. 시인이 꿈이고 현재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를 바라보며 "가난 대통합인가"라고 생각('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도 있나')하는, 작가의 자조적 농담에도.
"한편, 저는 이제 제가 쓴 것을 읽어주는 사람들에게도 힘껏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작가의 말'에서) 9년 전과 달라진 건 기댈 줄 아는 마음인 듯하다. 그러니까 우리가 오래오래 김현의 문장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소식이다.
진달래 기자 az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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