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창으로 간토 조선인 학살 100년...일본의 부인·한국 무관심에 우익만 기고만장
일본 계엄군 학살 가담·경찰은 유언비어 유포
증거 자료 넘치는데 일본은 "없다"며 안하무인
혐오 날개 단 일본 우익, 희생자 모욕 집회도
지난달 31일 일본 사이타마현 요리이 마을의 사찰 ‘쇼주인'에 있는 작은 묘비 앞에서 진혼제가 치러졌다. 1923년 9월 1일 일본 중부 간토지역에서 대지진이 발생한 지 며칠 만에 일본인 자경단에 잔혹하게 살해당한 조선인 엿장수 구학영이 잠든 곳이다.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간토 학살) 진상 규명 활동가인 김종수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역사관’ 관장이 한국 인사들과 함께 구학영의 원혼을 위로했다.
대지진 직후 일본 내각부는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키고 있으니 경계하라"는 전문을 전국에 보냈다. 구학영은 3일 요리이 경찰서를 찾아가 신변보호를 요청했다. 그러나 이웃마을 자경단은 5일 경찰서에 난입해 그를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62군데나 찔린 그는 자신이 흘린 피를 손으로 찍어 ‘벌 일본 무죄(罰 日本 無罪)’라는 글을 바닥에 쓰고 눈을 감았다. ‘일본을 벌하라, 나는 무죄다’ 또는 ‘일본이 죄 없는 나를 벌했다’는 뜻으로 읽힌다. 끝까지 억울한 심정을 토하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일본 군경과 자경단, 조선인 6600여 명 무참히 학살
간토대지진으로 10만여 명이 숨져 민심이 흉흉해지자 재일 조선인들을 겨냥한 유언비어가 퍼졌다. 마을에 불을 지르거나 우물에 독을 타 일본인들을 살해한다는 내용이었다. 일본군과 경찰, 주민들이 조직한 자경단은 유언비어의 사실관계도 파악하지 않은 채 조선인들을 학살했다. 진상 규명이 되지 않아 피해 규모가 집계되지 않았지만 당시 독립신문은 재일 유학생을 중심으로 조사한 결과 조선인 6,661명이 희생됐다고 보도했다.
일본 내무성 경보국과 조선총독부는 조선인 희생자를 각각 231명과 832명이라고 발표했으나 축소한 숫자라는 게 정설이다. 2009년 일본 정부 중앙방재회의는 “학살이라는 표현이 타당하다”며 학살당한 조선인이 전체 지진 사망자의 1% 혹은 한 자릿수%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보고서를 냈다. 그러나 지난달 31일 일본 정부 대변인인 마쓰노 히로카즈 관방장관은 “전문가들의 의견일 뿐 일본 정부 견해는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구학영의 묘비에는 이름, 나이, 고향 주소까지 새겨져 있다. 일본인 친구가 시신을 거두고 묘소를 만들어 준 덕분이다. 조선인 희생자의 대다수는 신원이 확인되기는커녕 시신도 찾지 못했다. 총칼과 죽창에 잔혹하게 살해된 후 증거 인멸을 위해 불태워지거나 강에 버려졌기 때문이다. 도쿄, 지바, 가나가와, 사이타마 등 간토지역 곳곳에 세워진 추모비에 억울한 죽음의 흔적만 겨우 남아 있다.
일본 정부발 유언비어가 학살의 큰 원인
일본 정부는 지진 발생 당일부터 확산된 유언비어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조선인을 탄압하는 데 악용했다. 치안 책임자였던 내무성 경보국장 고토 후미오의 명의로 “조선인이 각지에서 방화를 하고 있으며 폭탄을 소지하고 석유를 뿌리는 자가 있으니 엄하게 단속하라”는 전문이 전국 각 지방에 발송됐다. 치안 유지 명목으로 2일 오후 계엄령을 내렸고 계엄군도 지바 등에서 조선인 학살에 가담했다.
정부 전문을 받은 각 지역에선 자경단이 결성돼 조선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죽창과 칼로 살해했다. 일본인을 조선인으로 착각하고 죽일 정도로 무차별적이었다. 재판 기록을 보면 학살자들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고 조선인을 찾아 죽이는 것이 매우 정당하고 애국적인 행동이라고 여겼다. 유언비어를 검증 없이 실어 나른 일본 언론들도 학살 명분을 제공했다.
100년 동안 사실 은폐... "기록 없다"
유언비어가 허위로 판명 나자 일본 정부는 은폐를 시도했다. 9월 5일 임시진재사무국 경비부는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철저히 조사하고 (소문이) 사실이 되도록 긍정적으로 노력하겠다”고 뜻을 모았다.
일본의 진상 은폐는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일본 정부는 "기록이 없다"며 국가 차원에서 학살에 관여한 사실 자체를 부인한다. 간토 학살 진상 규명에 평생을 바친 재일 사학자 고 강덕상 등의 노력으로 많은 증거 자료가 발굴됐음에도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마쓰노 관방장관은 8월 30, 31일 정례 기자회견에서 간토 학살에 대한 질문을 연달아 받고 “정부 조사에 한정한다면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내무성이 보낸 전문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는 질문에 대해서도 “(전문의 존재를 알고 있지만) 그 내용의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정부 안에서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일본 정부의 반성 없는 태도에는 한국 정부가 간토 학살에 무관심했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 해방 후 한국 정부는 일제강점기 일본의 만행에 대해 따지고 배상을 받으려 했으나 일본에서 벌어진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냉전 시기 한국 정부는 재일동포 사회가 북한에 기울어져 있다고 의심하며 거리를 뒀다. 2000년대 이후 한국 시민사회가 재일동포 인권 문제에 뒤늦게 관심을 가지면서 간토 학살 진상 규명 운동이 시작됐다. 100주기를 맞은 올해 3월 여야 국회의원 100명이 ‘간토학살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을 공동 발의했으나 입법 논의엔 진전이 없다. 외교부는 이와 관련 “그간 간토대지진 관련 일측에 진상조사 필요상을 제기하고 진상규명을 위한 자료 제공을 요청한 바 있다”며 “앞으로도 필요한 조치를 검토해 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학살 부정 우익 단체 기고만장... 모욕 집회도
집권 자민당의 지지 기반인 일본 우익은 학살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역대 도쿄도지사들은 매년 9월 1일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에 추도사를 보냈지만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는 2017년부터 보내지 않고 있다. 그는 올해 2월 조선인 학살에 대해 “무엇이 명백한 사실이었는지는 역사가들이 밝혀낼 문제”라고 말해 학살의 실체를 부정했다.
일본 정부와 도쿄도의 이 같은 태도는 우익의 식민역사 지우기와 재일동포 차별에 날개를 달아줬다. 우익 단체 ‘소요카제’는 매년 도쿄 스미다구 요코아미초 공원에서 조선인 학살 피해자 추도식이 열릴 때마다 3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학살을 부정하는 시위를 벌였는데, 올해는 아예 추도비 바로 앞에서 시위를 하겠다고 신고했다. 논픽션 작가 가토 나오키는 소요카제를 향해 "네오나치가 홀로코스트 추도비 앞에서 유대인 추모 집회를 열겠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비판했다.
우익의 준동은 재일동포의 생존권을 위협한다. 전문가들은 이제라도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에 진상 규명을 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김종수 관장은 “간토 학살 100년을 맞아 한국 정부와 국회가 그동안 방기했던 책임을 다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도쿄= 최진주 특파원 pariscom@hankookilbo.com
문재연 기자 munjae@hankookilbo.com
Copyright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엄마가 둘' 동성 부부, 건강한 딸 낳았다
- 의사, 헬스 트레이너…경찰관 추락사 아파트엔 8명 더 있었다
- 100m 가는데 30분 걸려… "'교토의 불국사' 옮겨버리고 싶어" 하소연
- "돼지처럼 잘 먹네, 꺼져"... 마리오아울렛 회장, 벌금형 확정
- 현빈, 의외의 장소서 포착…아내 손예진과 데이트 근황
- "사형을 내려주세요" 했던 연인 보복살해범, 1심 무기징역
- 드론과 미사일이 뒤덮은 러·우크라 하늘… “최대 규모의 무인 공중 전투”
- 친딸 추행한 남편 살해하려 한 40대 엄마… 법원 선처 이어 검찰도 항소 포기
- "관광객에 물 끼얹고 삿대질도"…오버투어리즘 '끝판왕' 바르셀로나 가보니
- 줄리엔 강·제이제이, 내년 5월 10일 결혼식…사회는 윤형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