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세상] '역사는 은폐될 수 없다' 100년 전 오늘 간토대학살을 증언하고, 기억하고, 기록하다
역사는 은폐될 수 없다. 시대를 함께 건너온 사람들이 증언하고, 기록하며, 애도하기에. 권력을 가진 이들의 전유물도 아니다. 역사를 입맛에 따라 수정하려는 시도를 시민들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 하는 이유다.
오늘로부터 딱 100년 전인 1923년 9월 1일 토요일 오전 11시 58분. 일본 간토(關東)지방에 진도 7.9의 강진이 발생했다. 최종 사망자가 10만 명에 이르고, 이재민은 무려 340만 명에 달한 엄청난 재난. 뜬금없게 "조선인들이 불을 지르고 다닌다, 우물에 독을 탄다"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흥분한 일본 민중은 자경단을 만들어 '조선인 사냥'에 나섰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건으로서 간토대지진의 대략적 개요다.
재일사학자 강덕상은 1975년 발간된 '관동대진재'와 이를 보완해 2003년에 펴낸 '학살의 기억, 관동대진재' 등을 통해 간토대학살에 얽힌 일본 정부의 책임을 세상에 고발했다. 그는 두 가지 의문을 품었다. ①자연재해에 왜 일본은 계엄령을 발동했을까 ②조선인 학살을 조장한 유언비어는 어디서 나왔을까. 한평생 간토의 진실을 연구한 강덕상은 당시 출동한 계엄군의 회고와 일기, 일본 내무성, 육군, 경찰 등 정부기관의 자료를 샅샅이 탐구해 이 같은 결론에 다다른다.
'간토대학살은 흥분한 자경단이 벌인 예상치 못한 범죄가 아니다. 이재민이 반정부 투쟁에 나설까 두려워 내각이 직접 유언비어를 퍼뜨려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아 위기에서 벗어나려 한 것이다. 계엄군·경찰·민중(자경단)이 삼위일체가 되어 조선인 사냥에 나선 것이 간토대학살의 본질이다.'
1923년 12월 5일 자 '독립신문'은 학살로 인한 희생자가 '6,661명'이라 보도한다. 조선총독부 등 일본 민관은 희생자를 수백 명 수준으로 축소하여 발표했다. 일본은 지금까지 사죄와 배상은커녕 진상규명조차 거부하고 있다.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는 2017년 이후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에 추도문을 보내지 않고 있는데, 100주기인 올해에도 마찬가지다.
간토대학살은 그렇게 잊혔다. 그러나 기억하고, 증언하며, 기록하는 사람들이 발굴해내는 역사를 향한 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2023년 9월 1일, 간토대학살 100주기를 맞이하여 우리가 마주해야 할 역사를 상기시키는 책 3권이 출간됐다.
①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는 사람들의 용기가 모여
간토학살 100주기 추도사업추진위원회와 민병래 작가가 함께 쓴 '1923 간토대학살 침묵을 깨라'는 지난 수십 년간 간토대학살의 진실을 규명하고 알리기 위해 노력해 온 이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진상규명에 투신하며 '일본이 가르치지 않는 일본사'를 대학에서 강의한 역사학자 강덕상의 강의를 들은 일본인 니시자키 마사오는 1982년 '추도모임'을 결성하고 증언과 자료를 모아왔다. 오충공 다큐멘터리 감독은 1983년 첫 번째 작품 '감춰진 손톱자국'에서 간토대학살 당시 학살을 목격한 일본인, 그리고 현장에서 살아남은 재일동포를 만나 증언을 영상으로 남겼다. 제각기 다른 삶을 살았지만 그들의 경로는 하나로 수렴한다. 바로 간토대학살의 진실을 드러내고 일본에 국가폭력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
책의 말미에는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지를 방문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역사기행 안내글이 수록돼 있다. 일종의 '다크투어 가이드'다. 도쿄를 중심으로 사이타마, 지바, 가나가와 지방의 학살터, 희생자 위령비, 감사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투어를 진행할 경우 1923역사관에 요청하면 조언과 자료를 받고 일본의 시민운동가가 동행하여 현장 설명의 기회도 가질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사람의 땀방울이 모여 역사라는 물길을 만들어 낸다.
② 반일을 넘어 국가폭력에 맞서는 한일 시민의 연대
문학평론가 김응교 시인이 쓴 '백년 동안의 증언'에는 일본의 시인 쓰보이 시게지(1898~1975)의 장시 '15엔 50전'이 최초로 번역돼 실렸다. '15엔 50전'은 일본어로 발음했을 때 '쥬우고엔 고쥬센'으로 읽히는데, 학살 당시 탁음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조선인을 분별하는 데 쓰였던 어구. 모두 14연 204행에 달하는 장시를 번역하며, 일본에서 비교문학을 공부한 김 시인의 2005년 논문을 기반으로 한 시 해설까지 수록되어 있다. 이에 더해 지난 20년 동안 김 시인이 일본 현지를 답사하고 기록한 증언들을 한데 모았다. 책을 통해 단순히 민족적 반목이 아닌 국가폭력에 다 함께 저항하는 한일 시민들의 연대를 엿볼 수 있다.
③ 희생자의 말이 시(詩)가 된다면
저자 정종배가 직접 명명한 책의 장르가 '다큐 시집'인 '1923 관동대학살'은 참상을 그대로 보여주되, 이를 시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시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사실상 사료를 그대로 옮긴 부분도 많다. 저자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 실린 희생자 200여 명 자료와 생존자의 실화와 증언을 바탕으로 책을 저술하였는데 "신문 기사 행간에 배어 있는 통증에 무슨 말을 더 보탤 수 없었고,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 신문 기사와 자료를 거의 그대로 옮겨 실었다"고 설명했다. 수익은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100주년맞이 추모문화제 및 위령의 종루 보수를 돕는 사람들'에게 기부될 예정이다.
이혜미 기자 herst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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