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묻힌 KAL 격추사건 “269명 숨져도 받은 건 유품 몇 점”
“대한항공기 격추 사건이 나기 하루 전에 미국 JFK 국제공항에서 찍은 어머니의 사진입니다. ‘무엇이든 네 번은 시도해 보라’고 하셨던 강인한 분이셨는데….”
지난 28일 서울 서초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조원철(74) 연세대 건설환경공학과 명예교수가 어머니 권연금(당시 70세)씨의 빛바랜 사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권씨는 1983년 일어난 ‘대한항공(KAL) 007편 격추 사건’의 희생자다. 조 교수는 “미국에서 대학원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나를 만나러 왔다가 귀국하는 길에 변을 당하셨다”며 “뉴욕에서의 그날이 영영 마지막이 될 줄 몰랐다”고 했다.
미국과 구소련(러시아)의 냉전이 한창이던 1983년 9월 1일 새벽, 미 뉴욕에서 앵커리지를 경유해 김포공항으로 향하던 대한항공 007편은 알 수 없는 이유로 기존 항로를 벗어나 사할린 인근 영공에 진입했다. 출동한 소련 전투기는 미사일을 발사했고, 민항기인 007편은 격추됐다. 비행기에 타고 있던 한국·미국·일본인 등 269명 전원이 사망했다. 소련의 비협조로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유품 일부만 유족에게 왔다고 한다.
올해로 사건 발생 40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명확한 사고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007편은 미 앵커리지 공항을 출발한 뒤 10분 만에 항로를 이탈했다. 한미는 사건 직후 원인 조사에 나섰지만, 구소련과의 냉전으로 사건 현장에 접근할 수 없어 좌절됐다. 사건 10년 뒤인 1993년 7월 국제민간항공기구(ICAO)가 구소련이 제공한 블랙박스 분석 보고서를 냈는데, 여기엔 “조종사가 자동관성 항법장치(INS)가 아닌 수동 조종식인 나침반 모드로 운행했다”고 돼 있다. 조종사 과실에 무게를 둔 것으로 풀이됐다.
그러나 일부 유족은 의구심을 제기했다. 조 교수는 “ICAO는 당시 사건 축소에 급급하던 소련의 블랙박스만 갖고 분석했기에 100% 신뢰할 수 없다고 본다”며 “당시 운행을 담당했던 천병인 기장은 비행시간만 1만540시간이 넘는 베테랑이었는데 실수했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겠느냐”고 했다.
서울 영등포구에 사는 심재관(72)씨도 40년 전 이 사고로 어머니 배분순(당시 67세)씨를 잃었다. 배씨는 심씨의 큰누나와 여동생을 보러 미국을 방문했다가 귀국하는 길에 사고를 당했다. 심씨는 “육 남매를 고생해 키우신 어머니가 한순간에 사라졌다는 게 믿기지 않을 뿐이었다”고 했다. 유족들은 전두환 정부의 동구권 유화 정책, 노태우 정부의 러시아 국교 수립(1992년)이 이어지면서 사건 진상 규명이 어려워졌다고 했다. 심씨는 “전두환 정권이 88 서울올림픽의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 참여를 민감하게 여겼고, 이 연장선상에서 우리 정부가 1991년에 소련 측에 14억달러의 차관을 제공했다”며 “자연스럽게 사건은 묻힐 수밖에 없었고, 007편 폭파 문제가 러시아와 국교 수립 이후에는 외교적 문제로 거론된 일이 거의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고 했다.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한 달 뒤인 1983년 10월에 북한이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을 일으키면서 국민적 관심사가 폭탄 테러로 이동한 것도 영향을 끼쳤다.
사건 이후 40년이 지나면서 희생자들의 부모·배우자 등이 위주였던 유족회도 자녀 세대로 교체가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3대 유족회장을 맡고 있는 유준선(54)씨는 건설 장비 회사에 다니던 아버지를 사고로 잃었을 당시 14살 소년이었다. 유씨는 “유족회에 100분 정도가 모여 있는데 할 만큼 했지만 밝혀지는 진실이 없어 지쳐가는 것이 사실”이라며 “가슴 찢기는 기억을 이제는 잊고 싶다는 분도 많다”고 했다. 유씨는 “이제는 유해 한 조각, 유품 한 점이라도 받는 게 소망이 됐다”고 했다.
유족들은 각종 외신 보도, 남겨진 유족들의 심경 등을 정리해 젊은 세대가 살펴볼 수 있도록 할 예정이라고 한다. 심씨는 “이 사건이 냉전 시대의 큰 비극이었음을 어린 세대들이 기억했으면 한다”며 “엄혹한 외교 질서 속에서 약소국으로 전락하면 또다시 당할 수 있는 일인 만큼 후세에도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했다.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1983년 9월 1일 대한항공 007편이 당시 소련 영공이었던 모네론섬 부근 상공에서 소련군 전투기에 격추된 사건. 007편은 뉴욕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을 출발, 알래스카 앵커리지를 거쳐 김포국제공항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이 사건으로 탑승 인원 269명 전원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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