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좋은 장관, 나쁜 장관, 이상한 장관

박준식 특파원 2023. 9. 1.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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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7조원을 투자해 공장을 지으려던 세계 3위 글로벌웨이퍼스를 미국으로 방향 틀게 한 인물이 지나 러몬도 미 상무장관이다. 그가 지난해 9월 초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이 배경을 풀어놨을 때 그저 본능적으로 '참 뻔뻔하고 나쁜 장관'이라고 여겼다. 가로채기를 했으면 한 거지 그걸 또 언론에 공표한 저의가 의심스러워서다. 이런 사례를 계속 만들겠다는 의지는 국익 앞에서 동맹이 헛구호란 생각도 들게 했다.

러몬도는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짓기로 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도 올초 무리한 요구를 했다. 보조금을 받으려면 보육시설을 짓고 초과수익을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도체 회사는 자선단체가 아니고, 수익공유는 자유시장경제를 도입한 국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익공유 의지가 분명한 것을 확인하면서 이념에도 우선하는 미국 정부의 뉴노멀을 깨닫게 됐다. 이 전제 조건의 초안을 주도한 이가 상무장관 러몬도였기에 그제서야 이 사람은 뭔가 다르다고 다시 보게 됐다.

러몬도는 올해 미국 고위급 인사 가운데 4번째로 중국을 찾았다. 재닛 옐런 재무장관은 중국이 들고 있는 미국 국채와 시장 매도세를 달랠 목적으로 방중했기에 언행을 최대한 삼갔다. 이런 구도에서 러몬도 역시 디플레이션에 진입한 중국을 부드럽게 다독일 줄로 예상했다.

하지만 그는 예상보다 강했다. 러몬도는 기자들을 상대로 "미국 기업으로부터 중국이 너무 위험해져서 투자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다"며 "그중에는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벌금과 불분명하고 미국 사회에 충격을 준 방첩법 개정, 기업에 대한 압수수색은 우리가 대응해야 하는 완전히 새로운 수준의 도전"이라고 지적했다. 기술패권을 두고 중국과 사실상 전쟁을 벌이고 있는 장수가 혈혈단신 적국에 들어가 내놓은 발언이다. 서열이 한참 앞서는 국무장관 토니 블링컨도 입에 담지 못한 직설이다.

러몬도를 더 탐구하다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란 것도 알게 됐다. 러몬도는 2년 전인 2021년 7월 1일에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상대로 맞섰다. 시 주석이 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행사에서 미국에 대한 직접 지칭 없이 "중국을 괴롭히면 머리가 깨져 피가 흐를 것"이라고 경고하자, 러몬도는 '허세(Bluster)'라고 가볍게 무시했다. 러몬도는 "(그의 발언은) 분명히 허세와 레토릭(수사)이 많다"고 지적하며 "미국은 우리의 게임을 할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러몬도의 활약상을 보고 있노라니 미국 역사상 상무장관이 지금처럼 빛났던 적이 있나 싶다. 공식적으로는 행정부 서열 10위라 하지만 사실상 반도체와 인공지능 패권 다툼을 본인 스스로 개척해 법안을 주도하고 중국을 견제하는 데 앞장서면서 이른바 '바이드노믹스'를 주도적으로 설계하고 있다. 검사 출신인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과 결국엔 자웅을 겨루게 될 인물이다.

지성과 패기로 무장한 여성 장관을 부러워하다가 눈에 들어온 뉴스는 모국의 여성경제학자 출신 장관에 대한 내용이다. 국내 최고학부와 미국 박사 유학을 마치고 교수생활과 국회의원까지 지낸 이 장관은 난데없는 숙박 논란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행정부 수반인 국무총리가 파행으로 얼룩진 잼버리 대회를 장관이 직접 야영지에서 지켜내라고 지시했는데도 십수킬로미터 떨어진 공무원 숙소에서 잠을 잤다는 비판이다. 일만 잘한다면야 잠이야 어디서 자든 상관없지만 일을 그르쳤기 때문에 미운털이 박힌 듯 싶다.

욕은 충분히 먹었으니 변명도 필요하다. 현 정부가 그에게 주문한 첫 번째 임무는 자신이 취임한 주무부서의 해체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선거 이후라 정체성이 확실하지 않다보니 유야무야되던 형국이다. 그런 배경에서 보자면 이상한 임무가 이상한 장관을 만든 게 아닐까. 장관의 자질을 정책이 아닌 숙박처로 따져야 하는 상황은 국민들을 불행하게 만든다.


박준식 특파원 win0479@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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