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포부터 부산항까지 616년…교류·평화의 유산 찾아서

강동진 경성대학교 도시공학과 교수 2023. 9. 1.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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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지건축과 함께하는 오 부산-유산과 미래 <1> 프롤로그

- 태종7년 ‘이포개항’ 2포 중 하나
- 동북아 주요 무역루트이면서
- 성신교린으로 왜국 제어까지
- 20세기엔 국제 소통 창구 역할
- 피란민 받고 전쟁 후 재건 기반

- 변방의 입지가 첨단이 될때까지
- 외세 침략·국난 극복의 선봉에
- 개방·다양성 가진 부산만의 기질
- 그 정체성 만든 ‘유산’ 톺아보기

#1

부산의 뿌리는 동래다. 동래는 신라시대부터 있었던 아주 오래된 도심이라 하여 고도심(古都心)이라고도 한다. 동래는 낙동강과 수영강을 좌우로 하고, 금정산을 북으로 또 백양산과 황령산을 남으로 두었다. 강과 산들로 넓게 위요된 천혜의 요새와도 같았다. 동래읍성은 그 중심 지대에 마치 새 둥지와 같은 형상으로 자리 잡았다.

1872년 ‘두모진’ 지도. 연안을 중심으로 선형으로 발달했던 19세기 부산을 잘 표현했다.


어떤 도시든 완벽할 순 없다. 아킬레스건이 있기 마련이다. 고대사회에 강은 생태적 속성을 넘어 물 공급과 물자 유통, 그리고 이동을 위한 매우 소중한 자산이었다. 물자와 사람이 모이는 곳, 즉 강줄기들이 모이는 곳에 성읍이 성립될 수밖에 없었다. 그곳은 정치와 경제의 중심이 되었으니, 강은 간혹 침탈을 위한 루트로 돌변했다. 그래서 조선은 낙동강의 끝점에 다대진을, 수영강이 끝나는 지점에 수영성을, 동천 하구가 내려다보이는 증산에 부산진성을 설치했다(17세기에 현 장소로 이전).

부산(釜山)이란 지명은 부산진(성)과 연결된 명칭이다. 성이 있던 증산이 큰 가마솥을 닮았다 하여 가마 부(釜)에 메 산(山)을 결합한 이름이다. 어찌 됐든 가마솥을 닮은 삼각 모양 산들이 배경이 되고 그 앞 바다를 사이에 둔 길쭉한 선형 지대가 ‘19세기까지의 부산’이었다.

#2

20세기 들어 부산은 동래와 통합되며 점차 대도시 부산으로 성장해갔다. 부산은 우리나라 동남쪽 ‘끝’에 자리한다. 중심에 벗어난 끝은 세상이 주는 여러 혜택에서 멀어져 있는 것 같지만, ‘종점(終點)의 경제학’이란 말이 있듯 끝이 가진 장점과 매력은 무궁무진하다. 국토 끝단인 부산은 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맥줄기들 사이로 연결된 도로망과 철도망의 끝점들이 모이는 곳이자 넓은 바다와 미지의 세계를 향한 새로운 시작점이기도 하다.

역사 속에서도 드러나듯 이러한 입지 여건은 부산을 우리나라의 ‘변방’(on the edge)이 아닌 ‘첨단’(on the cutting edge)이 되게 했다. 이런 관점에서 정확히 이해할 것이 있다. 언제부터 그런 역할을 시작했느냐에 대한 논의다. 대개 이 기점을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1876년으로 여긴다. 그러나 첨단으로서 역할을 알렸던 시계추는 한참이나 뒤로 돌려놓아야 한다.

1407년(태종 7년)은 대변혁의 해로 생각할 수 있다. 왜의 침략을 근원적으로 막고 제어하기 위한 조선정부의 결단, 즉 이포개항(二浦開港)으로 기록되는 자주적 개항의 원년이다. 그 이포가 바로 부산포와 내이포(진해)였다. 1872년 그려진 ‘두모진 지도’는 19세기 부산 모습을 가장 정확히 규정하는 지도라 할 수 있다. 동래가 제외된 것으로 보아, 연안을 중심으로 선형으로 발달한 옛 부산을 표현한 최고의 지도라 할 수 있다. 지도 속 부산은 분명 동래의 변방 같아 보이지만, 한편으론 조선의 첨단지대였음을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후 염포(울산)를 포함한 삼포개항, 1510년 삼포왜란, 1512년 임신조약, 1544년 사랑도왜변 등을 거치며 왜와 국교 단절과 재개가 반복되는 혼란스런 과정에서도 부산포의 역할은 변하지 않았다. 혹독했던 전쟁(임진왜란) 후에도 행보는 계속됐다. 1607년 부산포의 바로 곁 두모포에 최초의 왜관이 설치된 것이다. 왜관 역사는 네 차례 이전을 거치면서도 1872년까지 지속됐다.

호기심이 발동한다. 이즈음 동북아시아 해상 정세는 어땠을까? 왜와 포르투갈의 인연은 1543년 시작했다. 연이어 네덜란드가 개입했다. 1634년 나가사키의 개항장이던 ‘데지마(出島)’의 역사가 시작된다. 데지마가 문을 닫은 것이 1859년이었다. 17~19세기는 근대적 개항이 있기 전 탐욕스런 서구 열강의 식민시대가 활성 되었던 때다. 동북아시아도 영향권에 속했고, 서구 상인이 은을 구하려 나가사키까지 오르내리던 시대였다.

그 무렵이 부산포를 국제무대에 드러내는 데 일조한, 조선의 네 번째 왜관인 초량왜관의 존속 기간(1678~1872)과 거의 일치한다. 더구나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총 열두 차례 일본으로 문물을 전한 조선통신사의 파견 기간과도 거의 중첩된다. 분명 그때 부산(포)은 동북아시아 무역 루트의 중요 거점으로 기능했을 것이다. 상상해 보면, 제법 많은 배가 부산포(동쪽)와 초량왜관(서쪽) 사이 바다(현재 북항)를 오가며 무척 바빴을 것 같다. 그 바쁨이 어떤 때에는 긴장감으로, 또 기대감과 호기심으로, 또 두려움으로 돌변했을 것이다.

고무적인 사실이 있다. 조선 시대에 부산포가 문을 닫았다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은 것이다. 조선통신사의 출항과 귀항, 심지어 1592년 이순신 장군의 부산포해전 주 무대가 부산포 앞바다였으니, 조선에서 부산(포)의 역할은 실로 대단했다. 부산포를 부산항으로 연결시켜 보면 그 역사가 무려 616년에 이른다. 왜 문을 닫지 않았을까? 조선에서 부산(포)의 역할은 명료했다. 해상의 말썽꾼이던 왜를 성신교린(誠信交隣) 정신으로 제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일련의 과정은 부산을 교류와 평화의 도시로 이해하기에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3

이러한 부산의 역할은 완전한 개항장·무역항으로 기능한 20세기에도 유사하게 재현된다. 물론 일제강점기에 부산은 일제 침탈에 이용됐다. 그러나 부산은 진취적인 시대 의식의 표상이자 국제 소통의 창구로써 그 역할을 다했다. 해방기에 10만여 명 귀국 동포를 품었다. 한국전쟁 중 부산은 전쟁이 없었던 유일한 대도시였다. 조선 시대 생성된 ‘교류’ 씨앗이 1023일 간 피란수도로 투영되며 100만의 피란민을 받아내는 원동력이 됐다.

더욱이 부산을 통해 유입된 국제협력의 힘은 전쟁 역전의 또 다른 힘이 되어 부산은 국가 수호 역할을 했다. 1963년 이후 직할시 시대 부산은 전쟁 후유증으로 온갖 도시문제의 온상이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대한민국 재건 기반을 제공했다. 이와 함께, 동시대에 본격화된 민주화를 향한 저항정신은 1980년대를 거치며 올곧은 부산 정신으로 자리매김했다.

대개 부산에는 전통이 없다고들 한다. 외세 침략과 국난 극복 과정이 너무나 다급했고 험했기에 생겨난 얘기다. 그러나 전통의 폭을 넓혀보면, 즉 동래를 품거나 1407년을 기점으로 부산을 이해한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부산에는 지금 우리 사회를 만든 거대한 역사적 사건들이 오롯이 새겨진 풍경과 이야기가 곳곳에 중첩돼 있고 스며있다.

그 모습이 다소 무질서하고 복잡해 보이기에 혹자는 부산을 부정적인 외부 요인에 의해 만들어진 도시라 지적하고, 또한 근대화·도시화·산업화 과정 가운데 능동적 대응 없이 형성된 도시로 폄훼도 한다. 분명 맞는 얘기다. 이 순간 필자는 “만약 부산이 없었다면?”이라는 질문 아닌 질문을 던지고 싶다. 부산은 비록 아팠지만, 삶의 열정으로 가득했던 대한민국의 근대를 끌어안았던 도시다. 그래서 부산의 20세기는 그렇게도 다이나믹했다.

그 시간에 얻게 된, 아니 더 강해진 것이 있다. 그것은 개방성과 다양성이라는 무형의 속성이다. 이는 부산사람의 기질 형성과 지역문화 창달에 큰 영향을 미쳤으니 분명 시대로부터 부산이 받은 선물이라 할 수 있다. 생각이 여기 이르면 부산은 단순한 물리적인 관점의 대도시가 아니라, 다양한 층위의 것들이 삶과 어우러진 ‘역사문화의 살아있는 현장’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깨달음이 따라온다. 이것을 역사에서 형성된 ‘부산의 정체성’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부산 정체성의 근간이 되는 유무형의 것이 세월의 벽을 넘지 못한 채 약해지고 해체되고, 또 크게 변하고 있다. 그럼에도 상당수는 여전히 우리 곁 여러 흔적과 기억들로 잔존한다. 실제 우리 삶에서 작동하는 것도 부지기수다. 이것을 ‘부산의 유산’이라 부르면 어떨까? 정체성은 ‘일관되게 유지되는 존재의 본질’을 뜻하니, ‘앞세대가 물려준 소중한 것’을 뜻하는 유산과 통한다. 특히 유산은 보존만이 아니라 계승과 전승·활용에 방점을 찍는다. 유산을 많이 가진 도시일수록 풍성한 경험과 기억이 넘쳐난다. 그 풍성함은 결국 도시와 시민의 풍요로 전환된다. 그래서 선진의 도시들은 오래전부터 자신만의 유산을 찾는 일에 매진했고, 공감된 유산을 귀히 다루며 그 가치를 확장하는 일에 주력했다.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부산의 유산! 그것을 찾아보려 한다. ‘부산의 유산이 부산의 미래다’는 명제 정립에 도전해 보려 한다.

※ 공동기획 : 국제신문, 상지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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