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완두콩 한 알 때문에…
안데르센 동화인지 그림 동화에 이런 얘기가 있다. 어느 날 밤, 성에 한 여자가 온다. 밖엔 폭풍우가 몰아쳐서 비에 흠뻑 젖은 여자의 몰골은 말이 아니다. 그는 자기가 어딘가의 공주라고 한다. 성의 여왕은 공주의 잠자리를 봐준다. 천장까지 닿을 듯 높이 쌓아 올린 매트리스 더미 위에서 자는 거였다. 다만 그 몇십층의 매트리스 맨 아래 푸른 완두콩 한 알을 몰래 숨겨둔 것이 특이한 사실이었다.
아침에 여왕은 공주에게 묻는다. “잘 잤나요?” 그러자 공주는 대답한다. “아뇨, 한숨도 못 잤어요. 매트리스 아래 뭔가 있어서 그게 밤새 걸렸거든요.” 그제야 여왕은 기뻐한다. 진짜 공주를 찾았다고 외치며.
하도 오래전 읽은 동화라, 당연히 결말은 기억나지 않는다. 성의 여왕이 왜 그리도 공주를 찾아헤맸던 건지도 알 수 없고 말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완두콩 한 알이 등에 배겨 잠을 못 잔 사람이 왜 진짜 공주여야만 했는가를,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때로는 이 이야기를 그저 내 방식대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건 바로, 누구나 자기만의 푸른 완두콩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것. 완두콩 한 알이 삶의 지층 맨 아래 한 알쯤 깔려 있다고 해도, 하루하루 나날에 큰 지장이 있을 린 없다. 하지만 예민한 사람은, 그러니까 공기 흐름의 미묘한 변화 하나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영혼의 촉수를 지닌 누군가는, 그 작은 완두콩 한 알 때문에 잠을 설치기도 한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 성을 찾아온 동화 속 의문의 인물처럼.
온종일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더니 성큼 가을이 다가왔다. 불 켜진 창을 찾아 날아 들어온 어린 무당벌레가 노트북 화면 위를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아직 다 자라지도 못했는데, 벌써 서늘해지다니.’ 주황색 몸통에 까만 반점이 있는 무당벌레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릴지도 모른다. 나는 녀석을 조심스럽게 집어 올려 밖으로 날려줬다. 그냥 둔 채 잠들면, 정말로 저 작은 무당벌레는 완두콩처럼 침대 밑으로 파고들지도 모르니까.
※ 9월 일사일언은 김희선씨를 포함해 채길우 시인·제약회사 연구원, 이진혁 출판편집자, 이예하 ‘할머니와 나의 사계절 요리학교’ 저자, 임진주 2023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자가 번갈아 집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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