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2030] 한자 까막눈 아이의 ‘후라면’

남정미 기자 2023. 9. 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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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6세 아이와 함께 독일 베를린으로 휴가를 다녀왔다. 아이는 생후 200일 무렵 독일로 가 1년을 그곳에서 살았다. 엄마 아빠 기억엔 베를린이 있는데, 자신에겐 없는 이유를 요즘 한창 만화에 빠진 아이는 이렇게 해석했다. “내 기억은 봉인 돼 있어!”

우리에겐 휴가, 아이에겐 ‘봉인된 기억을 해제 하러 가는 여행'이 시작됐다. 인천-베를린은 직항이 없다. 비행기표 끊어 놓고, 프랑크푸르트에서 베를린으로 가는 ICE(기차)를 환불 불가로 예약해놓고도 망설였다. 순수하게 이동수단을 타는 것만 17시간. 우리 잘 갈 수 있을까?

싱숭생숭하게 공항 라운지에 앉아있는 내게 아이는 아주 재미난 걸 발견했다는 듯 속삭였다. “엄마, 저기에 후라면이 잔뜩 쌓여있어.” 후후 불어먹는 라면인가 싶어 아이를 따라가보니, 그곳엔 매울 신(辛)자 적힌 컵라면이 수북이 놓여있었다. 한자 까막눈인 아이 입장에서 보자니 그 글자는 꼭 ‘후’처럼도 생겼다.

베를린에서도 아이는 ‘후라면’ 때처럼 눈을 반짝이며 어른들은 못보는 것을 끊임없이 발견하고 즐거워했다. 정말 미각세포의 봉인이 풀린 것인지, 이유식 때 먹던 야채주스를 매일 3팩씩 마시고, 커리 부어스트에 마요네즈 찍은 감자튀김도 맛있게 먹었다. 아이 눈엔 차별이 없었고, 유명하다고 더 잘 봐주는 것도 없었다. 비오는 날 티어가르텐(공원)에서 깔깔거리며 짚라인을 20회 넘게 타더니, 베를린 상징 ‘브란덴부르크 문’을 지날 땐 시티버스 2층 맨 앞자리 명당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독일 아이들과 말이 통하건 말건, 놀이터에 한데 뒤섞여 흙을 파고 놀았다.

나는 해외여행가면 내가 짠 계획에 치여 늘 병나는 사람이다. 하나라도 더 보고, 먹으려다가. 아이를 따라 여행하니 관광은 사치고, 맛집은 언감생심이다. 그런데 꼭 봐야 하는 관광지가 없고, 반드시 가야 할 식당이 없으니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내가 한 여행 중 가장 본전 못 뽑은 여행이지만, 가장 많이 웃고 매일을 살아 낸 여행이었다.

가방 메고 학교 가는 것만으로도 대견했던 1학년 1학기를 지나, 아이는 다시 2학기를 시작한다. 개학 전날에서야 다급해져 “방학 때 너무 아무것도 안시켰다”고 하니, 남편이 아이의 일기장을 내민다. 그 곳엔 독일에서 탄 ICE 식당칸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숙소에서 내려다보는 강이 얼마나 예뻤는지가 삐뚤빼뚤한 글씨로 고스란히 적혀있었다. 어느새 선행학습을 하고 영어캠프를 가야 ‘알찬 방학’이라 생각하는 K학부모가 된 나에게 일침을 가하듯이.

아이를 낳지 못할 이유를 나는 100가지도 넘게 댈 수 있다. 그렇지만 내게 아이를 낳을 이유는 단 한 가지면 충분하다. 아이는 나를 새로운 세계로 데려가 준다. 그리고 나는 그 세계가 좋은 곳임을 믿는다.

집 앞에서 ‘ΟΟ한자’ 전단지를 받아들고, 한참을 고민하다 분리수거함에 넣었다. 언젠가 아이는 ‘후라면’을 ‘신라면’으로, 아니 그 보다 더 어려운 한자도 척척 읽어낼 것이다. 그 눈부시게 빛날 성장을 늘 응원한다. 그렇지만 아직은, 조금 더 ‘후라면’이어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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