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작가 신양란의 좌충우돌 해외여행 2] 세비야의 ‘버스 없는 날’에 홀연히 나타난 귀인(貴人)
[여행작가 신양란] 옛말에 ‘산 좋고, 물 좋고, 정자 좋은 데는 없다’고 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다 갖추기란 어렵다는 뜻이다. 이 말을 여행자 입장에서 숙소에다 적용을 하자면, 위치도 좋고 시설도 훌륭하면서 가격도 착한 곳은 없다는 말이 되겠다.
스페인 세비야에 갔을 때 묵었던 무리요 호텔은 위치가 좋았다. 세비야 대성당을 설렁설렁 걸어갈 수 있는 산타크루스 골목에 있었으니까. 가격도 저렴한 편이었다. 그렇게 두 가지를 갖추었으니 하나 정도는 포기해야 했는데, 방이 너무 좁아서 여행 가방을 펼치기도 힘든 게 흠이었다.
그래서 다시 세비야에 갈 때는 위치를 과감히 포기하기로 했다. 가난한 여행자가 가격을 개의치 않기는 힘드니까. 그리하여 시 외곽에 위치한 아파트먼트를 예약했는데, 산타 후스타 역에서 찾아가는 길이 꽤 험난했다.
우리가 보여준 주소를 보고 찾아갈 수 있다며 자신만만하게 출발한 늙수그레한 택시기사는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차를 세우고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물었다. 그런데 눈치를 보아하니 사람마다 말이 달라 종잡을 수 없는 모양이었고, 급기야 같은 길을 뱅뱅 도는 듯 같은 풍경이 보이기도 했다.
보다 못한 남편이 하루치 데이터를 쓰기로 하고 구글 지도를 켜 길 안내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우리가 예약한 숙소에 도착하였고, 택시 기사는 남편을 향해 엄지를 척 올리며 대단하다는 찬사를 보냈다. 참 천진난만한 노인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숙소 베가 데 트리아나 호텔은 찾느라 고생한 게 아깝지 않을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숙박비가 저렴한 곳이니 실내 인테리어는 썰렁하기 그지없었지만, 널찍한 침실에 욕조가 딸린 욕실, 거실과 주방을 갖춘 공간은 가난한 여행자에게 천국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하루는 문제가 생겼다. 늘 숙소 앞 버스 정류장에서 시내로 나가는 버스를 타곤 했는데, 그날은 좀처럼 버스가 오질 않았다. 네 개 정도 노선이 통과하는 곳이라 큰 불편을 모르고 지냈는데, 그날따라 30분이 지나도, 40분이 지나도 단 한 대의 버스도 오지 않았다. 나중에는 택시라도 타려고 했지만, 귀신이 곡할 노릇이 따로 없었다. 자주 보이던 택시건만, 막상 타려고 하니 한 대도 지나가지를 않았으니 말이다.
워낙 시내와 멀리 떨어진 곳이라 버스나 택시가 아니면 시내로 나갈 방도가 없었다. 여행자에게는 시간이 곧 돈인데, 참으로 막막하고 답답한 일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 넘게 버스 정류장에서 망연자실해 있는데, 지나가던 승용차 한 대가 우리 앞에 스르르 멈추어 섰다. 유리창을 내리고 “시내로 나갈 거면 타라. 태워 주겠다”고 하는 것 같았다. 그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그 상황에서 그런 말 말고 뭐 달리 심오한 이야기를 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남편은 ‘여행지에서 공연히 친절하게 구는 사람은 경계해야 한다’는 자신의 소신에 따라 사양하려고 했지만, 나는 앞뒤 잴 것 없이 냉큼 차에 올랐다. ‘까짓것, 돈을 달라고 하면 택시비 내는 셈 치고 주면 되지’ 하는 생각이었다.
시내까지 가는 동안, 차 안에는 답답한 침묵이 흘렀다. 우리 부부는 한국어만 능통하고, 그 역시 스페인어만 잘하는 모양이었다. 그가 우리를 위해 영어로 더듬더듬 뭔가를 설명했는데, 다른 말은 못 알아듣고 ‘No bus day(노 버스 데이)’라는 말만 겨우 알아들었다.
그날이 하필 세비야의 ‘버스 없는 날’이라서 버스 구경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만 파업으로 인해 버스 운행이 중단된 것인지, 아니면 그날이 전통적으로 버스 운행을 하지 않는 날인 것인지는 물어보지 못했다. 한국어밖에는 할 줄 몰라서.
어쨌든 아르마스 버스 터미널 앞에 우리를 내려준 그는 돈을 요구하거나 하는 일 없이 우리에게 멋진 여행 하라는 말을 남기고 훌쩍 떠났다. 그냥 친절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차가 출발하기 전에 “당신의 사진을 좀 찍어도 되느냐?”고 물었을 때 선선히 포즈를 취해 줘 사진 한 장을 남길 수 있어 다행이었다.
내게 세비야는 세비야 대성당과 알카사르, 에스파냐 광장 등이 있는 멋진 도시이지만, 그보다는 우리에게 친절했던 고마운 사람이 사는 곳이라서 더욱 그리워지는 곳이다.
그 사람 덕분에 그날 마에스트란자 투우장과 에스파냐 광장을 투어 할 수 있었으므로, 이 사진들을 보면 그날 일이 더욱 선명하게 떠오르며 마음이 훈훈해진다.
|신양란. 여행작가, 시조시인. 하고 싶은 일, 즐겁고 행복한 일만 하면서 살고 있다. 저서로 <꽃샘바람 부는 지옥><가고 싶다, 바르셀로나><이야기 따라 로마 여행>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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