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일상 채우던 생각의 파편들, 독자적 추상화법으로 담아내다

김신성 2023. 8. 31.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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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욱경 회화전 ‘낯선 얼굴들처럼’
일기장 속 미완의 이야기 들여다 보는듯
인체 드로잉 8점·종이작업 26점 선보여
특유의 대담한 필치… 美 유학 초기 작품
1972년 출간한 동명 시집서 제목 따와
시집에 삽화로 소개된 작품 6점도 진열
10월 22일까지 국제갤러리 부산전시관

“I DON’T KNOW WHAT YOUR DOING, BUT. I CAN’T HELP YOU BECAUSE I DON’T LIKE IT.” (당신이 무얼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그렇지만. 내 맘에 안 들어서 널 도울 수 없겠다.)

적나라하다 할 만큼 단호하게 적어넣었다. 그림 속 인물이 작가 자신인지 아니면 모델인지 구분할 수 없지만 마치 자화상처럼 보이는 얼굴 바로 옆자리에 대문자로 또박또박 썼다. 아마 자신이 한심해 보이고 뭔가 해내지 못한 채 지지부진할 때라든가, 그냥 삶을 소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표기한 듯싶다. 작가 최욱경(1940∼1985)이 종이 위에 연필로 그린 1960년대 작 ‘Untitled(무제)’다. 일부러 얼굴을 일그러져 보이게 그려 놓았다. 정제되지 않은 날 것의 감정을 그대로 전한다.

우리가 가끔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면서 “너 지금 뭐 하고 있니, 도무지 도울 길이 없다. 내키지 않아”라고 혼잣말 할 때가 떠오른다.
‘Untitled(무제)’ 2
‘1969년 3월 22일’. 제작일을 기재한 또 다른 ‘Untitled(무제)’에도 한 구절을 남겼다. 컴컴한 어둠에서 태아가 웅크리고 있는 듯한 형상 아래 “When the time comes will the sun rise … will the time ever come to me?”(때가 되면 해가 뜰까 … 과연 내게 때가 오긴 할까?)라고 다소 거칠게 쓰여 있다. 암담한 현실에서도 기대해보는 희망의 미래를 꽤 솔직한 언어로 서술하고 있다.
대담한 필치와 강렬한 색채를 사용했던 한국 추상회화의 대표 작가 최욱경은 초기 미국 유학 시절 본격적으로 자신의 독자적 추상문법을 구축했다. 국제갤러리 부산전시관은 당시 그가 다양한 실험을 하며 개인 및 작가로서의 고민을 고스란히 담은 종이작업 26점과 크로키(인체 드로잉) 8점을 소개하고 있다. ‘낯선 얼굴들처럼(A Stranger to Strangers)’이란 주제를 내걸고 10월 22일까지 관객을 맞는다. 최욱경 작품이 부산에서 전시되기는 처음이다.
‘Untitled(무제)’ (When the time comes…)
‘낯선 얼굴들처럼’은 작가가 1972년 첫번째 미국 체류를 마치고 잠시 귀국해 활동하던 때에 출간한 동명 국문 시집에서 따왔다. 유학 시절에 쓴 45편의 시와 16점의 삽화로 구성된 시집이다. 작가가 ‘뿌리를 흔드는 경험’이라 표현했을 만큼 모든 것이 새로웠던 당시의 생경한 환경과 자극을 마주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다져가던 과정에 대한 직접적인 텍스트이자 이미지의 기록이다. 시집에 삽화로 소개된 작품 가운데 ‘습작(習作)’, ‘실험(實驗)’, ‘I loved you once’(한동안 너를 사랑했다), ‘Study I’(습작 1), ‘Study II’(습작 2), ‘experiment A’(실험 A) 등 6점이 이번에 진열됐다. 작가 특유의 유머를 기반으로 때론 직설적인 제목이 붙여졌던 다수의 회화 작품이 한 편의 완결된 이야기를 전하는 식이었다면, 이번 전시의 드로잉들은 작가의 일상을 채우던 생각의 파편들, 일기장 속 미완의 이야기들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Untitled(무제)’
부단히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작업하던 작가의 당시 감정과 의식의 흐름을 지켜보는 듯한 느낌은 최욱경의 종이 드로잉 작품들이 선사하는 고유한 감각이다. 그의 콜라주 작품들이 현실과 이슈들을 즉각적으로 반영했다면, 드로잉 작품에는 종종 의식의 흐름에서 즉흥적으로 나온 단어 또는 생각 등이 담긴 텍스트가 등장한다.
1963년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한 뒤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한 최욱경은 작가로서의 역량을 확장하기 위해 유학을 떠난다. 잉크, 연필, 콘테, 판화 등 다양한 매체를 탐구하고, 낯선 환경 속에서 숱한 실험과 수행을 거쳐 자신만의 독자적인 언어를 형성해냈다. 크랜브룩 아카데미 오브 아트 대학원 과정에 진학한 후에는 그간 단순히 연습 과정이라 여겼던 드로잉 작업의 중요성을 깨닫고 다시 기본기를 다지기 위해 방대한 양의 소묘를 제작하기도 했다. 끝없는 연습과 함께 회화에 대한 지속적인 수련 열의를 식히지 않았던 그의 의지는 이후 시와 드로잉의 언어를 통해 가감 없이 발현된다.
‘Untitled(무제)’ (AM I AMERICAN). 국제갤러리 제공
‘Untitled(무제)-(AM I AMERICAN)’처럼 작가가 머나먼 땅에서 혼자 작업하고 생활하는 동안 ‘나는 미국인인가?’’ 생각했을 만큼 자기 정체성의 혼란을 보여주는 작품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집에 담긴 시 ‘그래도 내일은’을 보면 작가는 “그래도 내일은, 다시 솟는 해로 밝을 것입니다. 꽃피울 햇살로 빛날 것입니다”라며, 무수히 괴롭고 외로운 나날들 속에서도 내일은 희망찰 것이라 믿는다. 머뭇거림 없이 대범한 자신의 필치대로 꾸밈없이 솔직했던 최욱경의 시와 드로잉 작업이 적잖은 위안을 건넨다.

부산= 김신성 선임기자 sskim6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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