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해양 실크로드에서 혜초 생각하기
인도네시아 해양 실크로드 답사의 말석에 끼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자주 찾아오는 여행에서 혜초 스님과 가끔 동무하기로 했다. 비행기에게는 구름도 자갈이다. 걸음마 배우듯 뒤뚱거리던 비행기는 고도를 높이고서야 겨우 안정을 취했다. 활주로에서부터 끈질기게 따라오는 그림자처럼 계속 쫓아오는 일말의 불안감. 설산 같은 구름 위에서 더듬더듬 <왕오천축국전>을 읽는다. 관련 자료를 보면 혜초가 당나라에서 천축(인도)으로 들어갈 때, 믈라카 해협을 거쳐 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천년 훨씬 이전의 혜초이듯 이 오늘도 언젠가는 천년 전이 된다. <왕오천축국전>에 자주 나오는 혜초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출렁이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서로 ‘不殊’(불수·다르지 않음)하다고 하겠다. 그걸 조금 아는 물은 구름으로 잠시 떠 있고 그걸 많이 아는 돌은 저 아래 무덤 곁을 묵묵히 지키고 있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무엇을 보게 될까. 기이하고 희한한 것에 자꾸 눈길이 가겠지. 맛있는 것을 찾아 혀도 날뛰겠지. 빛을 본다는 뜻의 관광은 눈앞의 겉만을 탐할 뿐이다. 혜초는 무엇을 보았을까. 제자리에서는 그 어떤 너머로 향하는 마음을 더는 지탱할 수 없어 떠난 구도행. 발통 달린 것은 하나 이용한 바 없이 오로지 자신의 두 발에만 의지했으니 행각(行脚·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수행함)이라 함이 옳겠다. <왕오천축국전>에 그 마음의 일부가 드러난다. 혜초는 사람이 사물의 껍질에 덮어씌운 알록달록한 형용사는 극도로 배제했다. 가다, 이르다 등의 기본동작과 주로 의식주에 관한 정보만을 사막처럼 건조한 문장으로 적는다.
‘又一月程過雪山(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대목에 이르러 커피를 청했다. 전통복장의 말레이시아 항공 승무원이 설탕, 프림과 함께 스푼을 준다. 한번 쓰고 버리기에는 아까운 손가락 두 배 길이의 꼬챙이였다. 대식국(아랍) 편에서 ‘手把亦匙筯’(수파역시저·손으로 숟가락과 젓가락을 잡음)라고 할 때의 그 ‘筯’를 연상케 하는 나무막대기. 읽고 있던 책의 책갈피로 맞춤하겠기에 얼른 챙겼다. 손바닥만 한 창문 너머, 날개 너머, 흰 구름 너머로 천축국까지 가는 행로가 풀어져 있을까. 햇빛 속에 산산이 흩어져 숨어 있을 혜초를 떠올리며 또 구름 설산을 넘는다.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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