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호미의 길, 생명의 길

기자 2023. 8. 31.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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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엔 “그 집 고추는 좀 어뗘?” 질문이 잦다. 표정들로 보아 올해 고추농사가 영 시원찮은 모양이다. “뭐 그냥 그럭저럭….” 답한다. 생각보다는 잘됐다는 말은 생략한다. 벌레약도 뿌리지 않고 제초제로 풀을 잡지도 않았으며, 고추에 달라붙은 노린재는 툴툴 털어냈으니까. 비 한 방울 뿌리지 않는 땡볕 더위가 보름, 장대비가 쏟아진 날들이 보름씩 번갈아 찾아왔으니까. 악조건에서 이렇게나마 자라준 고추가 대견하고 기적 같다. 아무리 이상기후라지만 지금처럼만 되길 기원하는 심정이기도 하다.

김해자 시인

참외처럼 노릿한 토종오이 장아찌 몇 개 들고, 아랫집 언니집에 마실 가니 온 가족이 수돗가에서 고추를 씻고 있다. 큰 다라이 두 개에서 번갈아 씻겨지는 고추를 건지다 보니, 물속 고추 빛깔이 환상적이다. “이 색 좀 봐. 고추는 정말 이쁜 선홍색이고, 꼭지는 진짜 이쁜 녹색이다.” 나는 철없이 색을 찬양하고, 언니는 “올핸 고추 따는 재미가 없네. 고추가 죄다 떨어져서 줍느라…” 울상이다.

“옥수수는 좀 어뗘?”가 “고추는 어뗘?”를 거쳐서 “들깨는 좀 어쩔라나…”로 이어지는 동안, 나도 고추 따느라 바쁘다. 맨 아래 가지에 달린 고추를 따려면 거의 주저앉아야 하는데, 귀신같이 알고 깔따구와 모기들이 달려든다. 물리면 여러 날 동안 가려우니 마음이 급해진다. 급해지면 어린 고추가 제법 달린 가지를 부러뜨리거나 덜 익은 고추도 따게 된다. 앞에서 보면 붉은데 뒷부분은 푸르기도 하니까.

이런저런 이유로 고추 딸 때 숫자를 센다. 하나 둘 열 스물… 세다 보면 금방 100개가 넘어간다. 가격도 매겼다. 고추 하나에 100원. 100개면 1만원이고, 300개면 3만원 벌었다고 뿌듯해한다. 고추만 세지 않는다. 작물을 심고 거두며 숫자 세는 게 버릇이 되었다. 심지어 호미질이나 낫질할 때도 숫자를 센다. 호흡을 고르는 방법 중 하나인 셈이다. 작물 아닌 것은 싹 다 베어 없애버리겠다는 마음을 다스리는 방편이다. “곳간에 쌓아둘 무거운 가마니”가 아니라, “다만 가난한 한끼를 위”한 노동이 되기를 기원하면서.

기껏 추슬러진 마음이 괴담 뉴스 앞에서 힘없이 무너진다. 처리수와 방류수로 둔갑한 오염수가 커피보다 안전하다니. 삼중수소가 바나나보다 안전하다니. 원자로가 연쇄적으로 폭발한 이후, 후쿠시마 인근에서 다 자란 오이 배에서 긴 가지가 돋고, 다 큰 토마토 배꼽에서 잎이 솟아나고, 핫도그 열 개 묶어놓은 것 같은 가지가 태어나는데 안전하다니. 혈압이 오르는 것 같다.

나는 호미의 자식이자 어미, “무기도 못 되고 핏대를 세우는/ 고함도 만들지 않는” 호미를 들고 밭으로 간다.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산 귀퉁이 하나 허물지 않은” 호미를 쥐는 것은 생명을 망가뜨리는 현대문명에 대한 저항이자 작은 분투. 옥수수 뿌리 캐낸 자리에 배추를 심으려고 흙덩이를 부수다 호미조차 놓는다. 손으로 뒤집으니 흙 속에 바람길이 난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은

풀을 매고 흙덩이를 부수고 뿌리에

바람의 길을 내주는 호미다

어머니의 무릎이 점점 닳아갈수록

뾰족한 삼각형은 동그라미가 되어가지만

호미는 곳간에 쌓아둘 무거운 가마니들을

만들지 않는다 다만 가난한 한끼를

위해

이른 아침부터 저물녘까지 몸을

부린다

인간은 모두 호미의 자식들이다

호미는 무기도 못 되고 핏대를

세우는

고함도 만들지 않는다 오직

오늘이 지나면 사라질 것들을

가꾼다

들깨며 상추며 얼갈이배추 같은 것

또는 긴 겨울밤을 설레게 하는

감자며 고구마며 옥수수 같은 것들을 위해

호미는 흙을 모으고

덮고 골라내며 혼잣말을 한다

그러다 혼자돼 밭고랑에서 뒹굴기도 한다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호미야말로

인간의 위대한 이성을 증명하지만,

산 귀퉁이 하나 허물지 않은

그 호미가

낡아가는 흙벽에

말없이 걸려 있다

-시, ‘호미’, 황규관 시집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

김해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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