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의 문헌 속 ‘밥상’] 남작의 여로
“정말 남작이 심어서 남작이에요?” 지난 연재에 수미(秀美)를 다루었다. 그 여파인가 보다. 또 다른 감자, 남작은 어떻게 된 놈이냐는 질문이 단박에 돌아왔다. 포슬포슬하니 감자 단내가 확 끼치는 남작의 관능을 기억하고 있는 분이 꽤 된다는 뜻이겠지. “맞습니다, 남작(男爵)이 심어서 ‘남작’ 됐어요.”
남작의 본향(本鄕) 또한 수미와 마찬가지로 미국이다. 1876년 상품화될 때의 이름은 아이리시 코블러이다. 1900년경에 잉글랜드로 들어가 온 영국에 퍼졌다. 영국 별명은 유레카 또는 아메리카이다. 이를 가와다 료키치(1856~1951) 남작이 일본에 들여와 토착화했단다. 덕분에 남작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참고로 남작(男爵)의 일본어음은 ‘단샤쿠’이다. 그 품종명을 제대로 쓰면 ‘남작서(男爵薯)’, 그 일본어음은 ‘단샤쿠이모’이다.
가와다 료키치는 모든 면에서 서구화를 바란 전형적인 19세기 출생 일본인이다. 교토에서 의학을 공부하다 1877년 스코틀랜드로 유학을 떠나 7년간 글래스고대에서 기계공학을, 조선 현장에서 선박용 기관을 공부했다. 귀국해서는 제철·조선·항만 분야에서 일했고 1896년 선친의 작위를 물려받아 남작이 되었다. 1902년 미국산 증기자동차를 구입해 운전하고 다닌 일본 최초의 ‘오너드라이버’이기도 하다.
이런 인물이 감자를? 집안 내력이 있다. 그의 아버지인 가와다 고이치로(1836~1896)는 시코쿠 고치에서 자작농쯤의 소출을 거두던 시골 무사였다. 그런데 그는 동물적인 상인 감각이 있었다. 그는 초창기 미쓰비시그룹에 몸담고 산업 일선, 금융가, 정치판을 종횡무진했다. 미쓰비시는 오늘날까지도 회사 차원에서 가와다 고이치로를 기념하고 있다. 게다가 제3대 일본은행 총재를 지내며 중앙은행 안정에 이바지했다. 그 공은 1895년에 남작의 작위를 받음으로써 공인되었다. 반농반무(半農半武)의 보잘것없는 시골뜨기 하급 무사가 일본제국의 귀족이 된 것이다.
가와다 료키치는 흙을 아는 집안에서 자랐다. 스코틀랜드에서 감자의 가치에 눈떴고 아울러 ‘위대한 공업국은 위대한 농업국’임을 알아차렸다. 1906년 업무상 홋카이도로 가면서는 아예 개인 농장을 열고 원하는 작물과 신품종을 시험재배했다. 1908년경에는 영국 종묘상을 통해 아이리시 코블러를 들여와 홋카이도 농장에 심었다.
키워 보니 병충해에 강하고 많이 나고 저장성도 좋았다. 결정적으로 맛이 좋고 또 분질의 매력이 대단했다. 농장 일꾼들이 더 좋아했다. 심고 먹는 데 일꾼들이 더 적극적이었다. 자연스레 인근에도 퍼졌다. 1928년 홋카이도의 우량 품종에 선정되었고, 1931년 이후 전국적으로 장려되기에 이른다.
남작은 일본에서 일식 ‘사라다’ ‘고로케’ ‘오븐구이’ ‘버터구이’ ‘으깬 감자’를 할 때 여전히 가장 인기 높은 품종이다. 1928년 이후 한반도로 들어와서는 강원도를 중심으로 자리 잡는다. ‘남작’의 여로가 이렇다. 대서양, 태평양, 현해탄 또는 대한해협을 얼마든지 건넜다.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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