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혁명이 남긴 과제 살펴 지금 문제의 근원 찾읍시다”
[짬][짬] 염무웅 익천문화재단 길동무 공동이사장
“요즘 여러 가지로 위기의 시대입니다. 세상에 모순과 갈등이 가득한 이런 시기에는 출구를 모색하기 위한 사상적 움직임과 지적 노력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올해 창립 3년인 익천문화재단 길동무(공동이사장 김판수·염무웅)는 지난해 문학학교 개설에 이어 9월엔 인문학당을 정식으로 연다.
염무웅(82) 이사장이 명예학당장을 맡은 인문학당은 대표 강좌로 1789년 프랑스혁명에서 1968년 68혁명까지 대략 200년 동안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꾼 혁명의 역사를 살피는 ‘길동무 토요 세계혁명사’를 마련했다. 러시아혁명과 쿠바혁명, 멕시코혁명, 중국혁명, 베트남혁명 등까지 살피는 이 강좌에는 최갑수 서울대 명예교수(프랑스혁명)와 노경덕 서울대 교수(러시아혁명),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쿠바혁명) 등 각 분야 전문가 8명이 강사로 나선다. 인문학당은 또 기후위기와 난민 등을 주제로 하는 다큐멘터리를 ‘교재’로 세계인의 꿈을 말하는 ‘길동무 토요 다큐극장’ 강좌도 운영한다.
지난 25일 서울 교대역 근처 길동무 사무실에서 염 이사장을 만나 왜 지금 세계혁명사를 들여다봐야 하는지 물었다.
“이번 강좌는 프랑스혁명부터 베트남이 외세를 물리치고 민족자주통일을 성취한 베트남혁명까지 살펴볼 계획인데요. 지난 200년 동안 인류는 혁명을 통해 계급 해방 등 성취를 이뤘지만 한편으로 지구적 모순은 더 격화된 것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프랑스와 미국을 보세요. 시민이 내부 혁명을 이룩한 나라들이지만, 혁명 국가답지 않게 아시아와 아프리카 나라들을 침략했어요. 제국주의적 억압과 수탈을 통해 자신의 내부 혁명을 지탱한 거라고 볼 수 있죠.”
염 이사장은 이번 강좌를 통해 개인적으로 각각의 혁명이 인류에게 남긴 과제가 뭔지 살피고 싶다고 했다. 이유는 물론 지금의 문제가 뭔지 찾고 싶어서다. 그는 ‘기후위기’를 먼저 이야기했다. “기후위기 문제가 돌아올 수 없는 선을 넘었다고도 하잖아요. 18세기 중반 서구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자유민주주의 정치혁명과 동전의 양면입니다.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은 서로에게 발전의 동력을 제공하면서 결국 오늘의 기후위기와 환경파괴로 이어진 것 아닌가 싶어요. 혁명은 부분적 성취도 있었지만 동시에 이렇게 큰 문제도 남겨놓았어요.”
그는 “좌든 우든 극단주의는 피해야 한다. 극단주의는 파괴적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말도 했다. “러시아혁명은 레닌의 이상이 스탈린 시대에 최악의 상태로 변질됐고 프랑스혁명은 혁명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기요틴(단두대)이 등장합니다. 혁명을 지키기 위한 폭력이 결국 혁명의 자기부정에 이른 거죠. 중요한 점은 폭력의 문제보단 ‘혁명의 본질이 제대로 지켜졌느냐’이겠죠.” 이런 말도 했다. “20, 30대 때 극좌였던 사람들이 나중에 극우로 많이 변절하잖아요. 어떤 주장을 하든 그 주장을 자신이 제대로 감당할 수 있는지 살피는 내면적 성찰이 필수입니다. 남을 향해 극단적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이런 성찰이 결여된 경우가 많아요.”
염 이사장은 우리 시대에 가장 필요한 혁명이 뭐냐는 물음에 “정신 혁명”이라고 답했다. “수운 최제우나 소태산 박중빈 같은 한국의 종교적 성자들은 100년도 전에 정신 개벽을 이야기했어요. 함석헌 선생도 정신혁명을 주장했죠. 백낙청 선생 같은 분도 이제 그 흐름을 이어가고 있고요. 그러나 보다시피 지금 많은 사람들이 물질과 욕망의 노예로 살아요. 우리의 의식도 노예화돼 있습니다. 사실 개인으로서는 소박하고 검소하게 살고 싶어도 그렇게 살기 힘든 게 이 세상이에요. 당장 가족 안에서 반발이 나오죠.”
그는 2년 전 펴낸 산문집 ‘지옥에 이르지 않기 위하여’에서 “인류가 종말에 점점 다가가고 있다”는 비관론을 드러냈다. 회의적인 세계 전망의 계기가 궁금했다. “지금은 비관이 더 심해졌어요. 옛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는 ‘접근을 통한 변화’ 정책을 통해 옛 동독과 화해로 나아갔고 마침내 통일을 이뤘어요. 남과 북도 접근을 통해 서로 변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남과 북을 보세요. 북은 체제 유지를 위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태도인 반면, 남은 극도의 물질주의에다 외세 의존은 더 심해졌어요.”
문화학교 이어 인문학당 정식 개원
200여년 세계혁명사 강좌 등 운영
“혁명 국가, 제국주의 통해 내부 지탱
혁명의 본질 지키지 못한 자기부정”
우리 시대 가장 필요한 건 정신혁명
“노태우~노무현 20년간 쌓은 민주주의
윤석열, 18개월 만에 3분의1쯤 허물어”
국립한국문학관 초대 관장을 지낸 염 이사장은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를 이사장으로 2019년부터 3년 이끌었고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이던 2005년에는 평양 민족작가대회를 성사시켰다. 그는 5년 전 9월19일 당시 문재인 대통령의 평양 능라도 연설 현장에서 “굉장한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7분 연설 동안에 남북 인민의 영혼이 하나 되는 경험을 했어요. 하지만 한반도를 움직이는 진짜 권력자들이 이 연설의 순간을 용납하지 못했던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는 김영삼 대통령 임기(1993~1997) 때 남북 화해의 제도화를 이룰 좋은 여건을 맞았는데 무산된 게 안타깝다는 말도 했다. “돌이켜보면 1991년 옛 소련이 해체되고 2001년 알카에다의 9·11테러까지 딱 10년이 우리에게는 절호의 찬스였어요. 당시 미국의 클린턴 정부는 자신만만했고 중국은 개방 초기이고 러시아는 혼란스러웠죠. 김영삼 대통령이 강력하게 추진했으면 정전협정 체제를 넘어 남북 화해의 제도화로 갈 수도 있었어요.”
그는 윤석열 대통령을 두고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너무 문제가 많아 지금이라도 물러나야 한다”고 했다. “북방정책을 펴고 남북기본합의서를 만든 노태우 정부부터 시작해 금융실명제를 실시하고 군 쿠데타를 원천적으로 방지한 김영삼 정부를 거쳐 김대중, 노무현 정부까지 20년 동안 벽돌 쌓듯 만들어놓은 민주주의 건축물을 윤석열 정부가 1년 반도 안 돼 3분의1은 허문 것 같아요.”
염 이사장은 한국 문학계의 큰 어른이다. 따르는 문인·학자들도 많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좋은 노년의 길’에 관해 물었다. “자기 힘으로 일상을 책임지고 정신이 허물어지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게 모든 노년의 소망이겠죠. 더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는 옳은 소리를 자신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지 묻는, 자기 성찰이고요. 제가 지금 저한테 요구하는 것은 그 정도입니다.”
요즘 자신의 미출간 원고 정리에 힘을 쏟고 있다는 염 이사장에게 인문학당의 계획을 물었다. “시대의 고민을 함께 나누는 녹색사상과 종교사상 강좌도 열고 싶어요. 또 다른 공부 모임들과의 연대도 이루어지면 좋겠고요.” 인문학당 운영 실무자 송경동 시인은 “내년 3월엔 현대사회사상 강좌를 열 계획”이라고 보탰다. 인문학당 문의 (02)535-3465.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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