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익 칼럼] 세속의 삶과 그 항의
김병익 | 문학평론가
인공지능이 개발되어 사람과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보도는 내게 의외로 긴 충격을 준 것 같다. 근래의 발전으로 보아 당연히 이를 것으로 예측했으면서도 사물이 사람들과 말을 나눌 수 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고 오늘의 인간 문화가 새로운 단계로 뛰어오른다는 ‘인류사적 비약’이란 말만 되뇌고 있었다. 호모가 언어를 사용하여 사피엔스가 되는 30만년 전의 단계, 문자를 만들어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한 5천년 전의 호모 리테라투스 단계, 인쇄술을 이용해 글로 엮는 6세기 전의 인쇄혁명에 이어, 이제 인간세계는 사물로 하여금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게 하는 새로운 ‘인류사적 변혁’으로 나서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급변의 역사를 관통해서 삶을 누린다는 내 생애의 행운과, 어쩔 수 없이 여기 끼어든 변혁의 불안함이 안기는 또 다른 두려움이 드잡이하는 혼란에 나는 피할 수 없이 젖어들기도 한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사용할 수 있으리라 믿어온 언어가 사물에 의해서도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은 앞으로의 인류사적 사태를 어떤 형태로 불러올지 예측할 수 없는, 그래서 미래는 오히려 무섭고 불안한 예감으로 달려드는 것이다.
여기서 생각을 멀리 에둘러 찾은 인물이 다빈치(1452~1519)와 미켈란젤로(1475~1564)였다. 르네상스를 불러온 이 예술가들은 최고의 재능을 가진 이른바 ‘천재’로서 하늘이 안겨준 그들의 능력은 회화와 조각·건축을 통해 당대 주류의 기독교 정신을 르네상스의 인본주의적 감수성의 세계로 틀어 새로운 지향의 예술 지평을 열었다. 아이작슨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신봉아 옮김)의 생애와 월리스의 ‘미켈란젤로, 생의 마지막 도전’(이종인 옮김)은 이들이 치러낸 삶을 소개하면서 하늘로부터 타고난 천재다움과 함께, 당연히 우리와 다름없는 지상에 묶인 인간적 면모도 보여주었다. 내가 여기서 찾은 것도 그들의 타고난 초인적 예술보다는 이 험한 세상 속 그들도 피하지 못한 강박의 세속, 그들도 고통받아야 했던 지상의 누추함, 그럼에도 그 비속한 삶을 견디고 아름다움을 향해 세상의 너저분한 고역들을 이겨내는 인간적 견딤이었다.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의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건축가이면서 광학·지질학·무기 등의 과학기술자이고 식물학·해부학·의학의 생리학자로 당대의 모든 예술과 학문에 뛰어나게 능통했다. 그러나 고급교육을 받지 못해 당시의 지식인이라면 으레 사용했을 라틴어에 미숙했다. 사생아였고 이성 간의 성교에 혐오감을 드러낸 동성애자였으며 동물을 사랑한 채식주의자였고 딱따구리 혀를 그리고 싶어 한 왼손잡이로 현실과 공상세계를 구분하지 않았다. 그는 계획하고 설계했지만 그 많은 것들을 끝내지 못하고 상상의 자유를 더 크게, 마음껏 누린 ‘미완성의 천재’였다. 그 당시 발상조차 할 수 없었던 비행기를 설계했고(훗날 그가 설계한 대로 만들어본 그 기계는 날 엄두를 못 냈다), “구상을 현실화하기보다 구상 그 자체를 좋아한” 기술자였지만 끝내 “나는 사는 법을 배운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죽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말았다. 그가 쓴 글과 설계 등등 현존하는 원고·메모들은 7200쪽이지만 실제 양은 그보다 4배 더 많은 것으로 짐작되는데 “위대한 고통 없이는 위대한 재능도 없다”는 말로 자신의 인간다움을 정직하게 드러낸 그가 죽음을 앞두고 남긴 마지막 말은 “수프가 식고 있다”였다.
다빈치보다 23살 아래인 미켈란젤로는 그런 다빈치를 존경하기보다 오히려 혐오감에 젖어 있었다. 나는 피렌체에서 그의 다윗상을 보고 감동한 적이 있지만 미켈란젤로는 그의 대표작들을 완성한 후 노년의 삶을 여유 있게 즐기며, 여느 천재들과는 달리 자식들과 대가 예술가로서의 영예와 유복한 시민적 여유를 누리며 풍족하게 살았다. 그런 그도 석상 ‘모세’를 끼고 산 마지막 10여년은 죽음을 앞둔 노인의 한탄으로 점철되고 있다: “피렌체로 돌아가 죽음을 벗하며 그곳에서 쉬고 싶다”고 고백하고 “죽음은 오래 머문 감옥을 나서는 일”이라는 소감을 토하며 깊은 우울 속에서 “나는 노인이고 죽음은 내게서 청춘의 꿈을 빼앗아갔다”고 한탄했다. 장인에서 귀족 계급으로 신분이 상승했음에도 그는 “이제 나의 백발과 나의 고령을 내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미 내 손안에는 저승의 차표가 들려 있다/ 저승은 진정 참회하는 자만이 바라볼 수 있는 것”이란 시를 쓴 것도 이런 늙음의 자의식에서 나온 것이리라. ‘죄악과 무용성’에 침잠해 있던 미켈란젤로는 드디어 자신의 예술가 경력이 끝났다고 자인하며 ‘죽음에의 순명’을 확인한다. 병자성사를 받고 그는 “저승은 진정 참회하는 자만이 바라볼 수 있는 것”이란 말로 생애를 마친다.
‘미완성의 대가’ 다빈치와 스스로 ‘오류로 가득한 일생’이라 고백한 미켈란젤로는 중세의 세계를 넘어 근대로의 새로운 지평을 열면서도 자신들이 문을 연 르네상스의 실제 장면들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인공의 언어로써 새로운 세계로 변화할 미래의 모습들에 당황하면서 ‘선량한 죽음’이란 중세의 지혜를 떠올린다. 과연 오늘의 사물들은 어떤 형태의 세상을 만들 것이고 그 형상은 무슨 꼴을 보일 것인가. 중세를 지배한 것은 신앙이었고 현재를 아우르는 것은 과학이다. 신앙을 예술로 승화한 중세의 화가들처럼 태양계를 넘어서는 우주론이 지구적 인생관을 뛰어넘을 그 세계는 어떤 모습이며 그것은 어떤 쪽으로 그 영원성을 추구할 것인가.
다빈치도, 미켈란젤로도 자신의 육체적 수명에서가 아니라 자기 손으로 만든 작품에서 그 영원성을 품어 안아 들였고, 예술을 떼면 그들도 가냘프고 노쇠하며 결국 죽음을 한탄하는 여느 세속인들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었다. 그런 속살이기에, 예술은 끝내 그 ‘있음’의 덕성과 무상한 것들의 무의미함을 드러내는 인간적 자의식이 아닐까. 그렇다면 모나리자의 신비한 미소와 다윗의 힘찬 돌팔매는 이처럼 땅 위의 삶과 그 시간이 뿌리는 운명의 받아들임이고 비속한 지상세계에 대한 외로운 존재의 체념 어린 항의가 아닐지. 그렇다면 이 과학의 시대는 그 죽음 앞의 모습들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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