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일본 무반성·한국 무관심 속에 맞는 ‘간토대학살 100년’
100년 전 일본의 수도권인 간토지방에서 끔찍한 대살육극이 펼쳐졌다. 1923년 9월1일 일본을 강타한 간토대지진을 계기로 도쿄와 수도권에 거주하던 조선인 수천명이 군·경찰·자경단에게 학살당했다. 대지진 혼란 속에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탄다’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유언비어에 현혹된 일본인들이 살인귀로 돌변했다. 일본 정부가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선동했고, 군경을 동원해 학살에 가담했다. 일본군이 수십명의 조선인을 세워놓고 기관총으로 쏴 죽였다는 증언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국 땅에서 힘겹게 생계를 잇던 조선인들은 광기에 찬 일본인들이 휘두른 죽창과 몽둥이에 임신부와 어린아이마저 처참하게 죽어갔다. 당시 아시아 문명국을 자처하던 일본이 자행한 명백한 ‘제노사이드(대량학살)’ 범죄다.
간토대학살 참상은 1세기가 지나도록 전모가 드러나지 않았다. 일본 정부가 진상을 은폐해왔기 때문이다. 마쓰노 히로카즈 일본 관방장관은 지난 30일에도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며 발뺌했다. 하지만 1923년 내무대신이 작성한 ‘지진 후 형사사범 관련 사항 조사서’ 보고서, 이를 바탕으로 2008년 작성된 내각부 보고서가 있다. 일본 도쿄도가 관리하며 피해자 이름은 공개하지 않는 ‘사망자 조사표’도 있다. 목격자 진술 등을 토대로 한 학계·시민사회 연구결과도 축적돼 있어 의지만 있다면 진상규명은 어렵지 않다. ‘100년 전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 책임 회피 구실이 될 수도 없다. 2021년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미국에서 벌어진 ‘털사 인종 학살’ 100주기에 추모 성명을 발표한 본보기가 있다. 기시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이 참극의 진상을 밝히고 희생자와 유족에게 공식 사죄해야 한다.
한국 정부와 정치권 역시 진실 규명에 소홀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특별법’(2014년) 등이 국회에 제출됐으나, 회기 만료로 폐기됐다. 외교부 차원의 진상조사 필요성을 제기하고 자료제공을 요청했다지만 성의 있는 노력을 했는지는 의문이다. 피해국 스스로 외면하는데 가해국이 움직일 리 없다. 일본 교과서에서 간토 조선인 학살 기술이 삭제되고, ‘정당방위였다’는 우익 논리가 유포되는 퇴행엔 한국 정부 책임도 있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는 한·일관계 개선에 의욕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과거를 덮은 채론 진정한 한·일 화해로 나아갈 수 없다. 양국이 공동으로 진상 규명에 나설 것을 제안한다.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이 안심하고 생활하도록 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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