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 무대·의상부터 안무까지 `안은미스러움`이 가득하네

디지털뉴스부 2023. 8. 31.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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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후 역경과 그속에서 지킨 활력 담아내
차별에 맞서는 여성의 용기를 춤으로 승화
젠더역할을 지움으로써 안은미다움 드러내
안은미 (c)BAKi
안은미 (c)BAKi

월간객석과 함께하는 문화마당 현대무용 '여자야 여자야' 안무가 안은미

장맛비가 세차게 내리던 날, 국내외 공연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안은미를 만나기 위해 서울역 근처의 카페로 향했다. 카페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멀리서 느껴지는 분위기만으로도 창가 테이블에 앉은 이가 '안은미'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안은미스러움'의 첫인상은 그렇게 시작됐다.

대구로 향하는 KTX를 한 시간 남짓 앞두고 시작된 인터뷰에서, 그는 신작 '여자야 여자야' 제목의 의미를 묻는 기자에게 되레 질문을 던졌다. "작품 이름만 봐도 '안은미스럽다'는 느낌이 들지 않나요?" 두 번째 '안은미스러움'.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들과 함께한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 저신장 장애인들과 작업한 '대심땐스', 시각 장애인들과 함께 무대에 오른 '안심땐스' 등 세대·성별·문화의 경계를 넘어 다양하고 폭넓은 주제로 현대무용을 선보인 안은미의 시선이 한국 근현대를 살아낸 신여성에 가닿았다. 특히, 이번 신작은 국립현대무용단(단장 겸 예술감독 김성용), 국립극장과 함께 선보이는 첫 작품으로 국공립단체와는 자주 협업하지 않는 안은미에게도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 있는 의미 있는 도전"이다. 작품은 빼앗긴 나라에서도 '서울에 딴스홀(댄스홀)을 허하라'며 새로운 시대를 향해 자기만의 목소리를 낸 근현대 신여성들의 면면을 담는다. 안은미가 직접 무대와 의상 디자인을 맡아 그 특유의 미감을 얹고, 30여 년간 함께 작업해 온 음악감독 장영규의 음악이 덧칠해져 기대감을 더한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북적이는 카페의 소음이 차단되고, 오직 그의 목소리만이 남았다. 굳이 인터뷰를 위한 질문을 건네지 않아도 자연스레 답변을 이어가는 그의 이야기를 조금도 놓치지 않으려 테이블 가까이 의자를 당겼다.

-신작 '여자야 여쟈야'는 국립현대무용단과 함께 처음 선보이는 작품입니다. 이번 작품을 기획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요.

"국공립단체에서 가져야 할 문제의식과 방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그동안 여러 단체가 거쳐 온 행보를 보며 작품에 조금 더 일관성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국공립단체는 국가의 얼굴이기에 세련되고, 아름다워야 해요. 하나의 큰 비전 안에서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가 이뤄지고, 그렇게 점차 두터워지면서 하나의 역사로 자리 잡게 되는 거죠. 국공립단체는 그들만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연구하고, 학습하며 발전시킬 의무가 있어요. 제가 대구시립무용단장을 맡았을 때(2000~2004) 올린 첫 작품이 '대구별곡'이었어요. 대구라는 도시에 대한 무궁무진한 콘텐츠를 누군가는 선보여야 한다고 생각한 거죠. 이번 국립현대무용단과의 작업도 제가 할 일을 국공립단체를 통해 선보여야겠다는 마음으로 준비했습니다."

-특히, 20세기 초 근현대를 살았던 신여성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제강점기라는 고통을 겪었지만, 오히려 그러한 시대 상황이 있었기 때문에 신여성이 탄생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당시는 개항을 통해 알게 된 새로운 세상과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음악·미술·문학 등 다양한 장르에서 예술적 상상력이 폭발하던 시기였어요. 그 시대를 살아보진 않았지만, 그들이 입었던 복장만 살펴봐도 지금보다 훨씬 진취적이었다는 걸 알 수 있죠. 지금 우리에게는 새로움을 기대하고, 이상향을 꿈꾸던 그 시대의 에너지가 없어요. 빼앗긴 나라에서 그들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과 억압, 그 속에서도 지켰던 활기. 이러한 역경을 견디고 일어난 여성들의 힘을 춤의 언어로 만드는 게 제 목표예요. 여성이기에 어려웠던, 여성이기에 가능했던 그 모든 것이 담겨있는 삶의 여정을 춤으로 돌아보는 거죠."

-신여성은 단발의 헤어스타일과 서양식 옷차림 등으로 '모던걸'이라 불리며 화려한 시대를 누린 듯하지만, 고정된 성 역할과 구습을 비판하며 치열한 인생을 살기도 했는데요. 신여성의 여러 면모 중 특히, 작품을 통해 강조하고 싶은 면이 있었나요?

"당시 대부분의 여성은 교육을 받지 못했어요. 같은 여성이어도 교육받지 못한 여성들은 신여성들의 삶과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고, 신여성 역시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그들이 추구하는 주체적인 여성의 모습을 주장하기 어려웠죠. 겉으로는 화려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많이 외롭고 고달팠을 거예요. 저도 가족들로부터 이해받지 못한 부분이 있어요. 하지만, 이런 투쟁이 저를 예술가의 삶으로 이끌었고, 그보다 한참 전에 앞장서 투쟁했던 여성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저를 포함한 이 시대 여성들의 삶이 지금과 많이 달랐을 거라고 생각해요."

◇몸으로 전하는 여성들의 역사

-신여성들의 목소리를 다루는 작품에서 선보일 안무를 소개해 주신다면요.

"이번 무대의 목표는 단순해요. 고난의 세월을 거친 여성들의 삶만큼 열심히 춤을 출 예정입니다. 여성들의 역사를 몸으로 보여주는 거죠. 차별이라는 구습을 짊어지고도 계속해 나가는 여성들의 용기와 희망을 춤으로 선보이고자 합니다."

-작품을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 또는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과거 여성들의 삶은 어머니로서 자식을 바른길로 인도하고, 훌륭하게 키우는 것이 가장 중요했어요. 물론, 그 일을 해낸 위대한 어머니들도 많았죠. 하지만,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잖아요. 여성들에게 위대한 어머니의 역할을 넘어 한 개인으로서 위대한 삶이 허락되는 삶을 사는, 그런 시기가 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여성으로서, 안무가로서 작품에 추구하는 바가 있나요?

"제 작품에는 젠더 이슈가 없어요. 남성 무용수, 여성 무용수의 역할을 구분 짓지 않아요. 현대무용 자체가 젠더 구분이 없는 장르이기도 하지만, 성별을 떠나 개인이 잘할 수 있는 역할을 맡게끔 하는 거죠. 성별에 따른 안무 구분은 없지만, 동작에 따라 느껴지는 바는 달라요. 악기를 연주할 때, 같은 악보를 보고도 연주자마다 스타일이 다르듯이. 작품을 준비하면서 늘 스스로 엄격하기 위해 노력해요. 세밀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죠. 절벽 끝, 허허벌판에 서 있다고 생각하고 스스로를 구렁텅이에 몰아넣어요. 그렇지 않으면 게을러질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이번 작품 역시 충분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이전까지 '안무가 안은미'로서 여러분께 보여드린 만큼은 할 테니까요.(웃음)"

글=월간객석 홍예원 기자·사진=국립현대무용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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