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죽었다, 그런데 이름도 나이도 가짜라고?···일본에서 온 기이한 스릴러 ‘한 남자’[리뷰]
일본사회 문제 ‘자발적 실종자’ 소재
남편이 죽었다. 벌목 노동자였던 그는 나무에 깔려 유언 없이 떠났다. 아내는 슬퍼할 겨를이 없다. 남은 두 아이는 그의 몫이다. 다음해 기일, 오래전 절연한 남편의 형이 찾아온다. 그런데 영정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형이 말한다. “이 사람은 제 동생이 아닌데요?”
아내는 혼란에 빠진다. 나와 아이들을 지극히 사랑했던 그 남자는 누구란 말인가. “저는 도대체 누구와 함께 살았던 걸까요….”
지난 30일 개봉한 일본 영화 <한 남자>는 죽은 남편 ‘다이스케’(구보타 마사타카)의 이름도 나이도 가짜였음을 깨달은 아내 ‘리에’(안도 사쿠라)가 변호사 ‘기도’(쓰마부키 사토시)에게 남편의 신원 조사를 의뢰하면서 시작된다. 기도는 정체불명의 남자를 ‘X’로 명명하고 그의 과거를 추적해나간다.
기도가 작은 단서들을 근거로 X의 삶의 퍼즐을 하나씩 맞춰나가면서 그의 과거는 베일을 벗는다. X의 아버지는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킨 인물이었고, 사회의 낙인과 죄책감에 괴로워하던 X가 신분을 세탁한 과거가 드러난다. 그리고 이렇게 진짜 신분을 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영화는 보여준다.
아쿠타가와상 수상작가 히라노 게이치로가 쓴 동명의 소설(2018)이 원작이다. 자신의 존재를 지우고 새로운 신분으로 살아가는 자발적 실종자 ‘죠하츠’(蒸發·증발)를 소재로 한다. 영화나 소설 속에나 나올 법하지만 실제 일본 사회의 문제다. 하루아침에 이름과 가족 등 모든 것을 버리고 사라지는 사람이 매년 10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엉망이 된 인생의 스케치북을 찢어버리고 하얀 도화지 위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은 이유는 빚부터 실연까지 다양하다.
정체를 숨긴 인물의 과거를 추적하는 것은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의 단골 소재다. 그러나 <한 남자>는 추적자인 기도를 재일교포 3세로 설정하면서 영화의 질문을 한층 정치적인 것으로 확장한다. 기도는 한국 국적과 이름을 버리고 일본인이 됐다. 뛰어난 외모에 남들이 선망하는 직업을 가졌지만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는 것은 그에겐 계속 족쇄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도와 X는 ‘나는 누구이며 나를 나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 나란히 선다. 선하고 평면적인 사람으로 보였던 기도의 얼굴은 조금씩 달라진다. 기도가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금지된 재현’(1937) 앞에 선 포스터에는 영화의 핵심이 담겨 있다.
전작 <우행록: 어리석은 자의 기록>(2016)을 통해 빈부격차와 가정 붕괴 등 일본 사회의 환부를 깊숙이 들여다본 감독 이시카와 게이가 메가폰을 잡았다. 자칫 뜨거워질 수 있는 소재를 미스터리 장르 안에서 차갑고도 유려하게 그려냈다.
<워터 보이즈>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로 국내 관객에겐 일본을 대표하는 청춘의 얼굴이었던 쓰마부키가 완숙한 얼굴로 기도를 연기한다. 겉으로 보기엔 정의로운 변호사 같지만 속내를 알 수 없는 인물을 미세한 표정 변화만으로 표현해낸다. 그는 이 영화로 지난 3월 열린 일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차지했다.
지난 22일 영화 홍보차 내한한 쓰마부키는 기자간담회에서 “관객들이 ‘내 이야기’라고 받아들이며 보면 좋을 것 같다. 내 안에 여러 모습의 자신이 있는데, 다양한 스스로를 받아들이면 삶도 편안해지지 않을까”라며 “<한 남자>는 그런 걸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이 작품을 통해 구원받았다”고 말했다.
<어느 가족> <백엔의 사랑>의 안도 사쿠라가 계속되는 비극 속에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는 강인한 여성 리에를 맡았다. 그는 시종 음울한 기운을 내뿜는 영화에서 관객에게 마음의 안식처가 된다. 관객이 조금의 낙관과 함께 극장을 나설 수 있다면 이는 모두 안도 사쿠라의 공이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이다. 제46회 일본 아카데미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비롯해 8개 부문을 휩쓸었다. 12세 이상 관람가. 러닝타임은 122분.
최민지 기자 ming@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단독] 강혜경 “명태균, 허경영 지지율 올려 이재명 공격 계획”
- “아들이 이제 비자 받아 잘 살아보려 했는데 하루아침에 죽었다”
- 최현욱, 키덜트 소품 자랑하다 ‘전라노출’···빛삭했으나 확산
- 수능문제 속 링크 들어가니 “김건희·윤석열 국정농단 규탄” 메시지가?
- 윤 대통령 ‘외교용 골프’ 해명에 김병주 “8월 이후 7번 갔다”···경호처 “언론 보고 알아
- 이준석 “대통령이 특정 시장 공천해달라, 서울 어떤 구청장 경쟁력 없다 말해”
- “집주인인데 문 좀···” 원룸 침입해 성폭행 시도한 20대 구속
- 뉴진스 “민희진 미복귀 시 전속계약 해지”…어도어 “내용증명 수령, 지혜롭게 해결 최선”
- 이재명 “희생제물 된 아내···미안하다, 사랑한다”
- ‘거제 교제폭력 사망’ 가해자 징역 12년…유족 “감옥 갔다 와도 30대, 우리 딸은 세상에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