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북촌·강남은 미술 별천지…뉴욕·홍콩 뺨칠 수백억 아트페어
북촌 등 화랑가에서도 특별전
서울 북촌이 들떴다. 한국을 대표하는 화랑가가 뉴욕이나 홍콩의 번화가처럼 흥청거린다.
최근 국내외 대가들의 명품 전시가 일제히 막을 올리면서다. 갤러리와 아트센터 등에서 봇물터지듯 명품 행렬이 펼쳐진다. 실리콘과 유리섬유로 덩어리를 지어 시뻘겋고 시커멓게 착색한 영국 거장 아니쉬 카푸어의 근작들(국제갤러리 개인전)과 일본을 대표하는 현대미술거장이 된 요시모토 나라의 괴기스러운 소녀상 그림과 데이비드 호크니의 홈메이드사진프린트(송원아트센터 필립스 옥션 특별전), 한국실험미술 대가 성능경의 망친 사진들(갤러리현대), 실험미술 선구자 김구림의 회고전(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한국 리얼리즘회화의 대가 서용선의 인물 풍경 대작(아트선재센터), 글로벌 작가 양혜규의 인조 짚과 저구 조형물로 채운 한옥설치작품(국제갤러리 한옥갤러리) 등등.
여기에 북촌 들머리인 열린 송현녹지광장에서는 서울시가 개최하는 중진, 신진작가 야외조각전 ‘땅을 딛고’가 1일 시작하고 7일엔 개념적 회화의 거장인 사라 모리스의 전시가 갤러리현대에서 개막한다. 역시 7일에는 삼청동 일대 갤러리들이 밤까지 문을 열고 전시 투어와 디제잉 파티, 아티스트 토크 등을 진행하는 ‘삼청 나잇’ 행사를 진행한다. 모두 다 걸어서 5~10분 거리에 불과해 지역 자체가 거대한 세계 현대미술사 전시관이 된 듯한 느낌이다.
미술 동네 북촌에서 대가들 전시가 가을 초입 전례 없이 몰려들고 심야 투어행사까지 열리는 데는 배경이 있다. 영국에 본사를 둔 세계 굴지의 미술품 장터인 프리즈의 서울 전시와 한국 최대의 미술품 장터인 키아프가 6일 서울 강남 코엑스에서 공동개막하기 때문이다. 9일까지 코엑스 3층에서 열리는 프리즈엔 하우저앤워스, 거고시언 등 세계적인 명문화랑을 포함한 120여개 유력화랑이, 코엑스 1층에서 10일까지 하루 더 여는 키아프의 장터에는 국내외 210여개 화랑이 출품해 주력 작가들의 작품들을 부스마다 펼쳐놓고 흥정한다.
무려 330여개의 화랑들이 고대 조각상부터 서양 바로크 명화, 근현대기 인상파와 추상회화, 현대 개념미술, 설치작품까지 최고 수백억원대에 이르는 천문학적 액수의 미술품까지 거래한다. 세계 미술시장에서, 특히 중국과 한국의 유한층 컬렉터들에게 눈길을 받을 만한 근현대 미술거장과 주력작가들의 작품들이 모두 망라된다.
본전시 못지않게 특별전이 주목된다. 프리즈는 고미술품과 근대기 미술품 중심의 ‘마스터스’와 인도네시아, 인도 등 아시아권 화랑과 소장 작가들을 조명하는 ‘포커스아시아’ 등을, 키아프는 국내 미디어아트 유망작가들을 망라한 특별전과 채색화 거장 박생광·박래현 특별전을 통해 한국 미술의 정체성을 보여주겠다는 의도를 내세웠다. 서구 대자본이 추동하고 꾸리는 아트페어는 예술과 상술, 기술이 고도로 결합한 고급 엔터테인먼트 순회 무대다. 서구에 토대를 둔 대규모 미술품 유통업체들이 서구는 물론 아시아 시장의 다른 아트페어들까지 흡수하며 평정한 상태에서 미술자본이 홍콩과 서울 중 어디에 영업 활동의 무게 중심을 둘 것인지, 그들이 무대 뒤에서 벌이는 이권 경쟁의 결말에 관심이 쏠린다. 이번 두 페어는 바로 그 시금석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관람자 측면에서 보면 프리즈의 경우 출입문을 3개로 늘렸고, 키아프도 젊은 작가 중심의 키아프 플러스 등 연관전시를 코엑스로 일원화해 동선이 간소해지고 편안해졌다. 프리즈와 미국 엘에이 게티뮤지엄 연구소의 파트너십 전시 등 주목할 만한 콘텐츠들이 늘어났고, 아시아권 갤러리와 소장 작가들 소개에 주력한 ‘포커스 아시아’, 국내 젊은 영상 작가들을 보안여관 등의 대안공간에서 집중상영하는 ‘프리즈 필름’도 눈길을 둘 만하다.
세계적인 경기 하강과 금리 인상 등으로 엠제트(MZ) 투자자들의 급감과 경매시장의 하강 등 불투명한 요인들이 많아 낙관하기가 쉽지 않지만 적어도 전시의 질적인 수준은 올라갈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경쟁상대로 꼽히는 아트바젤 홍콩과 비교해 매출액이나 전시 행사에 참석하는 국제 미술계 실력자들의 면면 등에서 어떤 차별점을 보여줄지도 관건이다.
엔데믹으로 중국 유한층 관객들이 몰려올 것으로 기대하지만, 부동산 시장의 버블이 깨어지는 등 중국의 경제환경 자체가 급속히 나빠지는 시점에서 그들의 행렬이 구매 러시로 이어지질지는 뚜껑을 열어보아야 알 수 있을 듯하다. 외국 화랑들이 한국의 젊은 작가들을 주목해 이들을 대표작가로 내세우는 등 과거 유명작가에만 기댔던 전시 관행이 바뀌는 흐름에서 프리즈 또한 한국과 아시아 젊은 작가 갤러리 소개에 작년보다 훨씬 공을 들였다는 점이 도드라진다. 하지만 지난해보다 출품화랑은 줄었어도 여전히 90개 이상 많은 화랑들을 내보내는 키아프 전시가 그동안 넘지 못할 벽으로 여겨져 왔던 프리즈의 전시 수준과의 편차를 얼마나 줄이고 국제적 주목도를 높일 수 있을 것인지가 과제다.
북촌과 코엑스 말고도 서울 다른 권역에서도 프리즈∙키아프에 오는 컬렉터와 미술계 명사들을 겨냥한 명품 전시가 숱하게 열린다. 미술품 장터의 작품들 2차 판매, 홍보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세계적인 경매사 소더비, 크리스티 명품 전을 빼놓을 수 없다.
크리스티는 현대카드와 함께 다음 달 5∼7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전시문화 공간 ‘현대카드 스토리지’에서 장 미셸 바스키아와 앤디 워홀의 고액 작품을 선보인다. 바스키아의 1982년 작 ‘전사’(Warrior)와 워홀의 ‘자화상’(Self-Portrait)을 비롯해 전시품 10여점의 가격은 합계 1억5천만달러(약 2천억원) 규모라고 한다. 소더비는 파라다이스시티와 함께 내달 5일부터 인천 파라다이스시티 내 전시장 파라다이스 아트 스페이스에서 ‘얼굴 없는 작가’ 뱅크시의 ‘사랑은 쓰레기통에’(Love is in the Bin)를 내건다. 2018년 영국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풍선과 소녀’란 제목으로 낙찰됐으나 액자 내부에 숨겨둔 파쇄기를 작동시켜 작품 절반이 파쇄된 뒤 제목이 바뀌었는데 2021년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첫 낙찰가 104만2천 파운드(당시 환율 기준 16억9천만원)의 약 18배인 1870만 파운드(당시 기준 약 304억원)에 낙찰된 바 있다.
한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사설미술관인 삼성가 리움에서는 한국 개념미술의 대가 김범 작가의 전시 외에 강서경 작가의 전시가 7일 시작된다. 리움 근처에 두루 모여있는 외국계 화랑들도 요시모토 나라(페이스, 5일부터), 도널드 저드와 요제프 보이스(타데우스 로팍, 4일부터) 등 현대미술대가들의 명작전을 잇따라 연다. 대전시 인동에서 개관한 새 미술관 헤레디움은 8일부터 세계적인 독일 거장 안젤름 키퍼의 대형 근작 전을 마련한다.
프리즈·키아프의 명품들은 일반인들은 상상도 못할 거액에 거래된다. 작품 가액은 몇백억원 대다. 누리집에서 예매 중인 프리즈·키아프의 일반 입장료 티켓도 8만원이나 된다. 하지만 눈 호강 기회는 있다. 장터 개최 기간 즈음에 서울 북촌과 한남동, 강남에서 열리는 대부분 특별전시와 기획전은 모두 무료이고 특정한 날짜엔 심야까지 관람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프리즈·키아프 또한 입장료 부담이 다소 있지만, 동서양 고대 미술품부터 지금 현대미술사까지 미술시장의 지형도를 훑어보기엔 차고도 넘치는 방대한 작품들을 차려놓았기 때문에 가성비로만 보면 충분히 남는 관람이다. 다채롭고 풍성한 미술의 신세계를 엿보고 보는 재미를 누리고 교양을 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지난해 프리즈가 시작되기 이전에 서울에서 이렇게 풍성한 국내외 미술의 수작들을 볼 기회가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9월 미술 별천지는 놓치기 어렵다. 사전에 두 아트페어와 주요 화랑, 미술관들의 전시일정과 출품작가 면면을 각각의 누리집을 검색해 충분히 파악하고 각자 사정에 맞는 효과적인 일정을 짜서 움직이는 것을 추천한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프리즈·키아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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