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깊은 산속 선형석, 세오녀 타고 온 ‘돌배’였을까?

서울앤 2023. 8. 31. 15:58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㉓ 상상의 세계로 이끌어주는 교토 기후네신사의 석주(石舟)신화

[서울&] [교토, 걸으며 생각하며]

교토시 북부 산간 기부네산에 있는 기후네신사의 ‘선형석’. 배를 감추기 위해 돌로 덮었다는 전설이지만, 사실은 ‘신이 천반선(너럭바위배)을 타고 온다’는 석주(石舟)신화의 일종이다.

교토 북부 기후네 강과 구라마산 일대

깊은 산과 계곡 ‘기운발 좋은’ 피서지

거석신앙·석주신화 담은 신사의 돌배

신라 연오랑세오녀 설화 떠올리게 해

‘전설의 고향’ 같은 구라마산 절과 신사

교토 시민 즐겨 찾는 관광·트레킹 명소

산신령 덴구와 비극의 영웅 얘기 유명

흐르는 강물 위 식당 ‘가와도코’도 인기

교토시 북쪽 산간지대 중앙부에 기후네진자(貴船神社)라는 오래된 신사가 있다. 신사는 기부네가와(貴船川) 강가에 있는데, 기부네야마(716m) 산의 울창한 원시림과 깊은 계곡에서 뿜어져 나오는 맑고 찬 기운이 더할 수 없는 청량감을 안겨준다.

기부네 강은 옛날 교토의 수원(水源)인 가모강의 원류가 되는 계곡으로, 기후네신사는 고대부터 왕실이 물의 신을 모시고 기우제 또는 지우(止雨)제를 지내던 제사터였다. 지금은 이름난 피서지이자 강한 기 운이 느껴진다고 해서 교토의 ‘파워스폿’(power spot: 기운발 좋은 곳)으로 꼽힌다. 짝사랑하거나 헤어진 연인과의 결합에 효험이 있다고 해서 많은 여성이 찾아오는 ‘결연의 기도처’이기도 하다.

기후네신사는 이웃한 구라마야마(鞍馬山·569m) 산의 구라마데라 절과 유키(由岐)신사를 합해 한 묶음의 훌륭한 관광 겸 트레킹 코스이다. 구라마산은 ‘덴구’(天狗·얼굴이 붉고 코가 높으며 신통력이 있어 하늘을 자유로이 날아다닌다고 상상되는 깊은 산속의 괴물)로 대표되는 산신령과 영웅호걸들의 무용담으로 가득한 일본의 ‘전설의 고향’ 같은 곳이다.

필자가 이곳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기후네신사의 ‘선형석’(船形石·돌을 쌓아 배 모양으로 만든 바위) 때문이다. 고대 우리나라와 일본에는 다 같이 거석신앙이 있었는데, 너럭바위를 타고 하늘을 날거나 바다를 건너는 신화와 설화가 여러 곳에 산재해 있다. 기후네신사의 선형석도 그중 하나이다.

기후네신사 입구. 산문으로 오르는 돌계단에는 차고 맑은 기운이 가득하다.

너럭바위 돌배가 등장하는 석주(石舟)신화의 대표적인 예로는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연오랑세오녀’(延烏郞細烏女) 설화가 있고, 일본에는 신들이 하늘에서 ‘천반선’(天磐船·너락바위배)을 타고 내려왔다는 <일본서기> 속의 ‘건국신화’가 있다.

희귀한 선형석을 보기 위해 시 동북쪽 데마치야나기역에서 히에이잔전철을 타고 구라마역에서 내린 뒤 구라마데라를 거쳐 기후네신사로 넘어가는 코스를 짰다. 구라마산의 관광 상징인 ‘덴구’상의 마중을 받고 구라마데라 인왕문에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산속에 넓게 자리한 구라마데라와 유키신사를 둘러보고 서문으로 내려오면 기부네 지역이다. 기부네 강을 거슬러 상류 쪽으로 올라가면 약 700m에 걸쳐 본궁-중궁-오궁이 따로 있는 기후네신사에 도착한다.

기부네강의 강상(江上)식당 ‘가와도코’. 우리나라 유원지의 ‘자리’ 개념이다.

선형석은 기후네신사 오궁에 있다. 길이 10m, 폭 4m, 높이 2m, 둘레 24m 크기이다. 이 선형석에는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 분명한 두 가지 버전의 전설이 있다. 일본왕실이 시조로 여기는 진무덴노가 야마토 정권을 세울 때(어디까지나 가공의 역사이다), “진무의 어머니 다마요리히메(玉衣姬)가 오사카만에서 요도가와 강을 거슬러 올라와 이곳에 사당을 지었고, 그때 타고 온 배를 사람들이 돌로 덮어 놓은 것”이란 전설이 ‘왕실 버전’이다.

두 번째는 유사한 내용에 주인공이 진무의 어머니에서 가모신사 제신의 어머니(진무덴노 어머니 다마요리히메와 이름이 똑같다)로 바뀐 ‘신토(神道) 버전’이다. 왕모이든 신모이든 이 깊은 산속 계곡에 어째서 너럭바위 돌배가 도착했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일까?

물의 신에게 빌어 얻는 기후네신사의 물점. 물에 적시면 점괘가 나오는데, 정보무늬(QR코드)를 대면 4개 언어로 번역된다.

일본의 고대사가 중에는 신라의 연오랑세오녀 설화에서 실마리를 찾는 이들도 있다. <삼국유사> ‘기이 편’에 따르면, 신라 동해물가에 연오와 세오 부부가 살았는데, 어느 날 연오가 바닷가에 나타난 바위에 실려 일본으로 갔고, 남편을 찾아 세오 역시 바위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왕이 돼 있던 연오와 재회하고 귀비(貴妃)로 추대됐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묘하게도 기후네신사의 중궁은 헤어진 인연을 맺어주는 결연(結緣)의 신사로 이름이 높다. 고대 한 여류시인이 기후네신사를 찾아와 냉담해진 남편의 마음이 돌아오길 빌어 소원을 이룬 데서 유래했다는데, 고대의 이 지식인 여성은 무슨 ‘전승’에 근거하여 이 깊은 산속 신사에까지 와서 재회의 소망을 빌게 됐을까?

기부네(貴船) 지역은 원래 ‘기후네’로, 한자로는 ‘기우내’라는 발음의 氣生根, 木生嶺(우리말 ‘기운내’와 그 음과 뜻이 흡사하다) 등으로 쓰는 곳이었다는데, 언제부터인가 석주신화에 영향을 받아 같은 발음의 기부네(黃船. 다마요리히메가 탄 배가 노란색이었다고 한다)가 됐다가, 다시 기부네(貴船)로 변하게 된 것 같다. 왕이 된 남편을 극적으로 다시 만나 귀한 신분이 됐다면, 타고 온 배가 ‘귀선’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발상일 것이다. 그런 신사에 지체 높은 귀부인이 찾아와 남편과의 재결합을 간절하게 빌어 소원을 이루자 신사의 기돗발이 유명해졌고 그에 따라 신사 이름도 바뀌었다면 그 또한 이상할 것이 없다. 그게 대중의 마음 아닌가.

일본 중세 비극의 영웅 전설이 얽힌 구라마데라의 본전 금당. 마주 보이는 히에이산 전망이 아주 좋으며, 당 앞은 ‘기운발 좋은 곳’으로 유명하다.

연오랑세오녀 설화는 어쩌면 아득한 고대에 신라와 왜(일본) 양쪽 사람들을 모두 깜짝 놀라게 한 어떤 실화가 모티브가 됐을 것이다. 그 강렬한 기억이, 신들이 너럭바위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고, 신이 된 아들을 찾아 어머니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왕의 어머니가 바다에서 깊은 산속으로 배를 타고 들어오는 이야기를 낳았는지 모른다.

연오랑세오녀 설화 후반부는 연오와 세오가 왜로 떠나자 해와 달이 빛을 잃어 신라 왕과 백성이 당황하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것은 태양신앙과 철기문화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전래된 역사적 정황을 담고 있다.

일본 고대사가들에 따르면, 진무덴노가 야마토왕조를 세웠다는 신화 이전부터 야마토 지방에는 한반도에서 태양신앙을 가지고 들어온 모노노베씨(物部氏)가 먼저 살고 있었다. 그들 역시 조상이 ‘천반선’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창조신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모여 살던 오사카와 나라 지방에는 각각 ‘쓰가노’(都祁野)로 발음되는 지명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런데 연오와 세오가 일본으로 떠났다는 <삼국유사> 속 영일만 지명도 도기야(都祁野·현재의 포항시 동해면 도구(都邱)리)이다. “돌배를 타고 온” 모노노베씨의 조상은 연오랑세오녀였을까? 한·일 두 나라의 고대사는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과 밖이 이어져 있는 것 같다.

굳은 암반을 뚫고 나온 삼나무 뿌리가 지표를 덮고 있는 구라마데라 경내의 산길.

아무리 ‘고대사 덕후’라도 구라마 일대는 전설의 돌배만 보고 가기엔 풍광이 너무 좋은 곳이다.

구라마데라는 일본인이 좋아하는 비극의 영웅 미나모토노 요시쓰네(1159~1189)의 전설이 깃든 곳이다. 아버지가 전사하고 7살에 이 절에 맡겨진 영웅에게 산신령 덴구가 무술과 병법을 전수했다고 한다. 구라마산은 슈겐도(修驗道·산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심신을 수도하는 일종의 자연종교)의 수행지로서, 구라마산 덴구(서역인의 상이 분명하다. 유대인 설도 있다)는 일본 전역에 산재한 덴구들의 총대장 격이다. 전설의 흔적 말고도 삼나무 뿌리가 땅 위로 드러나 있는 나무뿌리길, 거대한 삼나무 고목이 신이 된 신사가 있는가 하면, 650만년 전에 인류 구제를 위해 금성에서 온 마왕을 신으로 모신 초에스에프(SF)적 사당도 만날 수 있다.

구라마역 앞의 산신령 ‘덴구’. 구라마산 관광을 상징하는 조형물이다.

구라마데라 경내의 유키신사는 한가운데로 통로가 난 특이한 형식의 신사인데, 매년 가을 ‘히마쓰리’(불의 축제)가 열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교토 3대 기제(奇祭)의 하나라고 하는데, 먼 곳의 밤에 열리는지라 ‘직관’까지는 아직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기후네신사를 나와 기부네 강을 따라 걷다보면 강물 위에 마루를 놓고 민물고기와 산나물 요리, 차와 술 등을 즐기는 ‘가와도코’(川床) 식당들을 볼 수 있다. 교토 계곡의 특별한 풍물이다. 돌아가는 기부네구치역까지는 약 2㎞. 드문드문 차들이 지나가지만, 맑은 시냇물 소리와 녹음 짙은 숲, 병풍 같은 삼나무가 번갈아가며 나그네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글·사진 이인우 리쓰메이칸대학 ‘시라카와 시즈카 기념 동양문자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한겨레 금요 섹션 서울앤 [ⓒ 한겨레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